집으로 돌아가는 길가에는 흐드러지게 열린 감들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꽃이 되고 싶어서였을까? 이미 푸른 잎을 떨구고 수줍게 내민 동그란 열매들이 나를 반기는 듯 해맑은 모습이었다. 또 감나무 밭 아래 돌담으로 둘러싸인 마을의 집집마다 약속처럼 많은 감들이 열려있었는데  이웃끼리 마음을 이어주듯 따뜻했고 마을은 가을 속에서 평온했다.

나무 가까이 다가가니 한 부부가 늘어선 감나무 아래에서 감을 따고 있었다. 그들 옆에는 어린 아이 둘이서 나무 사이를 오가며 놀고 있었다. 남자는 높은 가지를 향해 장대를 뻗어 감을 땄고 부인은 바닥에 내려진 감을 바구니에 담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장대를 숙일 때마다 그 끝에는 어김없이 잘 익은 감이 매달린 채 땅으로 내려왔는데 마치 아버지가 아이들을 위해 하늘의 달을 따주는 듯한 동화 속의 장면이 떠올랐다.

천천히 허공에 있는 감을 따고 줍는 일이 마치 그들 인생의 행복이란 열매를 따고 거두어들이는 일처럼 느껴져 흐뭇했다. 가을이 아름답다는 것은 풍경에서 얻어지는 느낌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을 수 있고 지나온 길을 더듬어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적 내가 살았던 우리집 아래로는 작은 포구를 거느린 바다가 보였고 뒤로는 대나무 숲이 울창했으며 대나무숲 앞쪽 모서리에는 큰 감나무 한 그루가 넓은 가지를 펼치고 있었다. 가을이면 나무 위에서 잘 익은 감들이 바다의 물결위로 반사되는 눈부신 햇살을 받아 반짝이곤 했다. 바다는 가지마다 잘 익은 감들 사이에서 잔물결을 찰랑거렸고 동동거리며 오고가는 작은 배들을  포구에 품고 있었다. 툇마루에 앉아 무료했던 나에게 어느 날 다가온 그 빛은 나를 끌어당기는 강한 유혹과도 같았다.

가을이면 배가 고픈 친구들은 우리 부모님이 집에 없을 때를 용케 알고 우리집에 놀러오곤 했는데 순전히 감을 따 먹기 위함이었다. 감을 따려면 나무의 꽤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했는데 그 때마다 우리는 감나무에서 떨어지면 죽는다는 어른들의 이야기에 나무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놀이가 죽음을 무릅쓰는 아슬아슬한 행위였지만 허기진 우리들은 다람쥐처럼 나무를 잘 타고 다녔기 때문에 가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어버리곤 했다. 어느 때는 몸의 중심을 잃고 가지에서 미끄러져 추락하기도 했는데 어느 날 내가 추락하던 그 짧은 순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공포에 질린 채 깊고 어두운 곳으로 가라앉으면서 머릿속에 든 생각은 죽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절망감이었다. 그 순간 밀려오는 왠지 억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나는 살아있었고 살아있다는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한동안 믿어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균형을 잃은 몸은 가지를 스치며 팔과 얼굴에 긁힌 상처에서 조금 피가 흘렀을 뿐이었다. 아마도 감나무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가 더했을 것이다.

그 때 내가 감나무 위에서 바라본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유혹처럼 빛났던 감들이 지금도 눈에 어른거린다. 가지가 휠만큼 열린 많은 감들이 그동안 지나는 길의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주었고  그들을 보면 모두가 내 세상인 양 흐뭇했는데 이제 나무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 아름다운 풍경이 사라지는 아쉬움이 남지만 시간은 또 다른 계절을 준비해야 하기에 우리는 늘 한걸음 물러서야함을 알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미 가을이 깊다.

다가오는 계절에 길을 열어주고 새로운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어김없는 자연의 질서이기에 안타깝지만 곧 가을을 보내야 할 것 같다. 아직 이 가을을 깊이 느껴보지도 못했으며 더군다나 모든 게 비어진 겨울을 맞을 준비도 안 되어 있는데 가을을 노래하던 고운 잎들은 벌써 떨어지고 여기저기 바람에 휩쓸린다. 세월은 늘 그렇게 허망하게 지나가고 우리는 다만 그의 뒷전에 서서 망연히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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