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한나절 책방양관수 소설가
  • 광양경제신문
  • 승인 2024.04.30 13:17
  • 댓글 1

벚꽃이 길을 가린다. 소금처럼 빛나는 꽃들의 광채가 길을 덮는다. 겨우내 산책길을 지키던 나무는 사라지고 꽃들이 자리매김한다. 한 여자가 꽃길을 걷는다. 콧노래를 흥얼거릴 만도 한데 숨을 멈춘 듯 꽃향기를 살피며 걸음을 내딛는다. 침묵을 지키는 만큼 더 깊이 꽃을 읽는다. 꽃 한 묶음에서 시가 들린다. 기다란 꽃길은 한 편의 소설이다. 꽃의 높낮이에서는 교향곡이 흐른다. 참새가 허공을 날며 지휘하는 걸까.

내가 열 걸음쯤 떨어져 여자 뒤를 따른다. 봄이기에 꽃이 피고 여자가 길을 나선 걸까. 여자가 나서니 꽃이 피고 봄이 온 걸까. 어쩌면 봄, 꽃, 여자가 한꺼번에 나타난 걸까. 그 속을 모르겠다. 봄, 꽃, 여자는 한통속이 아닐까. 맞아, 그럴 거야. 어차피 다 알지 못하는 그들의 속이 아닌가. 헤아리려 하지 말자. 봄이 마법을 부리듯 꽃도 마법이고 여자도 마법인데. 여자와 틈새 열 걸음을 지키려 나는 애쓰며 걷는다.

이 꽃길은 동에서 서로 길게 늘어졌다. 산책하듯 걸으면 1시간 반은 잡아먹는다. 서쪽 끝에 작은 서점이 하나 있다. 동쪽 끝에서 걷기 시작해 서쪽 끝에 도착하면 다리가 아프다. 서점에 들러 책을 고르고 의자에 앉는다. 책을 30분 넘게 의자에 앉아 읽기 힘들다. 골반이 아프고 졸린 탓이다. 재밌는 책은 서점 안팎을 서성이며 책장을 넘긴다. 그건 하품이 나와 20분을 넘기지 못해 책을 제자리에 꽂고 서점을 떠난다. 동쪽 끝까지 되돌아가 가는 데 한나절이 걸린다.

그 꽃길을 두고 사람들은 ‘한나절 길’이라 부르지 않고 ‘한나절 책방길’이라 한다. 꽃길을 왕복하는 데 한나절 걸리는 걸, 길 탓이 아니라 책방 탓으로 돌린다. 책을 사지도 않고 입장료도 없는데 왜 책방 탓을 하는 걸까. 아마도 오래된 책방이라 그렇게 부르지 싶다. 서점은 벚꽃을 피우는 벚나무보다 더 오래되었단다. 어쩌면 그 길을 오가는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살아온 서점이리라.

여자가 서점 출입구 앞에 멈춰선다. 나도 열 걸음쯤 뒤에서 따라 선다. 여자가 뒤돌아서더니 나에게 말을 건넨다. 서점 안에도 꽃이 피는데 사시사철 늘 만개한단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서점 안엔 꽃이 없고 책들만 있다고 대꾸한다. 여자가 눈을 감고 입을 다문 채 콧구멍을 벌름거린다. 잠시 후 눈을 뜨고 내게 말한다. 꽃향기를 찾아가라고. 내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여자가 앞서고 내가 뒤따라 서점으로 들어간다. 서점에는 주인이 없다. 책들은 고전부터 신간까지 다양하게 꽂혀있다. ‘한나절 책방길’을 거니는 사람들이 한 권씩 가져다 채운 책들이다. 여자가 책 한 권을 빼내 손에 쥔다. 허균의 『홍길동 전』이다. 책 가운데를 펼치더니 내게 쑥 내민다. 책에서 활자가 뛰어나와 꽃으로 피어난다. 검은 글자들이 톡톡 튀더니 꽃이 되고 향기가 퍼진다.

여자 팔이 나뭇가지처럼 변한다. 여자가 나무로 탈바꿈한다. 여자는 나무의 정령인가. 서점이 꽃으로 채워지고 향기로 가득하다. 나는 활자를 코로 들이키고 향기를 눈으로 맡는다. 나무가 된 여자에게 다가가 품에 안기며 책이 되고 싶다. 내가 여자의 마법에 걸린 걸까. 여자는 나무, 나는 책이 된다. 허름한 ‘한나절 책방’은 드넓은 고목이어라. 벚꽃 향이 가득한 책방이어라.

광양경제신문  webmaster@genews.co.kr

<저작권자 © 광양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양경제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1
전체보기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