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떠난 빈자리처럼 썰렁했던 우리집 작은 화단에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꽃들로 채워지고 있다. 하얀 방울꽃, 수선화, 히야신스, 튤립, 제비꽃, 돌단풍....... 꽃이 지닌 다양한 이름처럼 꽃의 색깔도 생김새도 그 향기도 저마다 독특하고 새롭다. 야생화들은 지난해의 기억을 되살리듯 다시 그들의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흔적조차 없던 땅에서 다시 꽃을 피우며 존재감을 밝히는 그들의 강한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생각할수록 신비롭다.

꽃을 피우는 시간은 잠시 동안이지만 그들이  처음으로 내미는 모습에서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는다. 그것만으로도 꽃은 충분히 귀하고 값지다. 찬찬히 둘러보면 봄날의 무대처럼 펼쳐진 산과 들판은 이미 약동하는 힘으로 넘쳐난다. 나무는 잔뿌리마다 물을 길러 올리고 가지마다 돋아난 새 움들은 성급히 피려는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 안간힘이다. 산촌의 봄은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축제처럼 마을 사람들을 설레게 한다. 물 건너 성철이네 부부는 길옆 작은 텃밭에 감자를 심고 있고  삼거리 진국이네는 산에 가득 쌓아놓은 참나무에 표고종균을 부지런히 심었다.

뒷산 언덕 천문대 동서네는 홍매화 40 여 그루와 많은 꽃무릇을 심었다며 얼굴에 화색이 돈다. 해마다 자연이 건네주는 훈풍에 사람들의 몸도 마음도 후끈 달아오르는 듯하다. 등으로 따뜻한 햇살을 느끼고 있자니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부랴부랴 무거운 옷을 벗어던지고 창고에서 괭이를 꺼내었다. 실개천 주변으로 이미 제법 자란 잡초가 며칠 전부터 눈에 거슬렸던 참이었다.

괭이로 흙을 파헤칠 때마다 흙에 묻혀있던 나무와 잡초들의 잔뿌리들이 헝클어진 그물처럼 드러났다. 뿌리만으로는 어느 것이 잡초이고 꽃이고 나무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뿌리를 보니 땅속에도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는 그들만의 전쟁터와도 같은, 치열한 삶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연이든 인간이든  살아가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이겨내야 하는 숙명을 지닌 듯하다. 산촌으로 내려온 지난 10 여 년 동안 나는 이곳에 얼마나 뿌리가 내려진 것일까? 어쩌다 먼 도시에 가서도 내 사는 곳이 그리워지고 가까운 읍내에 나갔다가도 다시 돌아오고 싶은 것은 내가 내민 뿌리가 비교적 견고하게 뿌리를 내밀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 나는 내가 새롭게 뿌리를 내린 곳, 그것도 싱싱한 삶이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이 자연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는 사실에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흔들리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 하지만 도시에서  바람처럼  방황했던 지난 기억들이 새롭다.
자연의 뿌리가 통째로 사라진 곳에 도시가 들어서고 발 디딜 틈 없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제대로 된 삶의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자연 속의 모든 것이 힘차게 뿌리를 내리는 이 봄날에도 사람들은 정처없이 흔들릴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삶일까? 몇 시간 동안 땅을 일구어낸 곳에 잡초 더미가 쌓이고 땅은 거추장스런 옷을  벗은 듯 말끔해졌다.

나무들이 움을 틔우려 애를 쓰듯 나도 그들을 위해 뭔가를 했다는 사실에 작은 일체감이 느껴진다. 내 몸에 흥건히 솟아난 땀 덕분에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 가볍다. 아무리 꽃이 피고 새싹이 움트는 날일지라도 땅에서 땀을 흘려보아야 제대로 봄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봄이란 시간이  무심코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동참해야 더욱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광양경제신문  webmaster@genews.co.kr

<저작권자 © 광양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