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그를 처음 만났던 것은 1976년 3월이었다. 입시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새롭게 얻은 자유가 다소 어색했던 신입생 시절 대학 강의실에서였다. 
군대를 제대하고 입학한 그는 우리보다 다섯 살이나 많았다. 그는 국방색 점퍼를 입고 있었는데 큰 옷에 가려진 그의 얼굴은 희고 작았으며 이목구비가 뚜렷해 마치 부잣집 귀공자를 연상케 했다. 다섯 살이나 먼저 세상을 경험한 그가 우리와 함께 신입생이 되었다는 것은 여러가지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보다 앞서 걸어온 5 년 이란 세월 속에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
항상 혼자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그를 보면 그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것이 궁금했지만 그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그는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항상 똑 같은 옷차림을 하고 다녔고 수업이 끝나면 재빨리 어디론가 달려갔던 것도 학비를 벌기 위한 것이었다. 그 당시 수원과 해남이 고향인 두 친구가 행당동 언덕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가 돌연 나타나서 신세를 좀 지자며 큰 가방을 밀고 들어왔다. 그곳은 우리들이 무료해질 때 자주 드나드는 아지트였다. 선한 그들은 그의 간곡한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후 부터 깔끔한 성격인 그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 야, 이 지저분한 놈들아, 이게 사람 사는 곳이냐 ?”방안을 가득 메운 자욱한 담배연기, 며칠씩 쌓아놓은 양말에서 피어오르는 고약한 냄새를 그는 참아내질 못했다. 그 때마다 그는 영하의 날씨인데도 방문을 활짝 열어젖혀서 방안에 웅크리고 있거나 바둑을 두던 우리들의 불평을 사기도 했고 부엌에서 연탄불을 피우고 쌓인 양말을 한꺼번에 빨았다. 그가 오는 날이면 잔소리 때문에 우린 좀 불편해졌지만 곧 집안이 깨끗해지고 방은 따뜻해져서 아랫목에서 어깨를 맞대고 달콤한 낮잠을 즐길 수 있었다.

그해 12월, 돌연 그가 신춘문예 당선소식을 알리며 문 앞에서 울먹이던 모습이 떠오른다.

바람과 도시: 이균영(동아일보)

역사를 전공했던 그가 소설을 쓰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놀라움은 매우 컸다.
그것은 그의 고단했던 과거를 보상해줄만한 큰 결실이기도 했다. 그날 저녁 우리 모두는 중국음식점을 빌려 파티를 열어 그를 축하했고 그 덕분에 자취방 벽에 걸려있던 큰 괘종시계와 친구 서너 명의 손목에 있던 시계를 전당포에 보내야야만 했다. 그 후로 그는 비밀스럽던 그의 고향얘기, 부잣집 대지주에서 몰락한 집안 이야기를 조금씩 털어놓으며 우리들 사이를 좁혔다.
 

그는 당시 우리나라 문단의 최고권위의 이상문학상을 받았고 또 역사학의 최고상인 단재상을 휩쓸며 소설계와 역사학계에서 승승장구했다. 나를 만나면 지금 10권 분량의 대하소설을 시작했다며 신들린 듯 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쏟아내곤 했다. 그러다가 1996년 새벽 느닷없이 교통사고로 이 세상을 떠났다. 이균영 ! 그는 그렇게 한줄기의 바람처럼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10 년 전 내가 광양으로 이사를 오면서 그는 내 머릿속에 많이 잊혀져있었다. 광양이 그의 고향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가고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나면 그가 살았던 집이나 주변을 돌아 볼 생각을 했다. 그런 어느날 우리집으로 손님 한 분이 찾아왔다. 그는 우리집 이곳 저곳를 자세히 둘러보더니 “ 이런 촌 동네에 멋진 공간을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겸손하고 진심이 담겨진 말투에서 따뜻함이 느껴졌다. ‘어디서 왔느냐 ?’ ‘이곳에 친척이나 아는 사람이라도 있느냐 ?’ 며 우리에 대해 매우 궁금해했다.  
 

그러나 이곳에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예전에 우리집 사람과 나를 연결해 주었던 사람, 이균영 형이 생각났다. 소설을 쓰던 이균영을 아는지 물었다. “ 엉 ! 균영이를 어떻게 ? ” “ 저와는 대학에서 같이 공부했고 친하게 지냈던 사이입니다” 그 분은 나의 한 마디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잠시 말문이 막히는 듯했다. “세상에 이런 인연이 ? 아이구야 ! 이제보니 균영이의 혼이 돌아왔구나 ! 이젠 기억에서 균영이를 지우려고 했는데.....” 그는 이균영을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고향 선배였는데 갑작스럽게 지난 기억이 밀려오는 듯 목이 메었다.
 

순간 나의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생각지도 않게 살아있는 이균영의 과거를 다시 만난 느낌이었다.
이균영 선배가 이 지역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희망이었고 큰 아픔이 되었는지를 그 분과의 많은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광양으로 내려온 것이 우연이 아니라 이균영과 연결된 어떤 끈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전 자명이라는 한 시인을 만났다. 이균영이 갑자기 하늘나라로 떠난 날 그 때 받은 충격이 너무 커서 같은 하늘 아래에 살아야할 이유가 없다며 훌쩍 이민을 떠났던 사람이었다. 얼마 전에 태평양을 건너온 그와 이균영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감격을 누렸다.
그 역시 이균영이 세상에 두고 간 끈이 아니었을까 ? 뒤늦게 우리는 그 끈을 찾았고 서로를 연결해 낸 셈이다.

엊그제 어릴적 그가 자주 찾았던 향교에서 그의 20주기 추모세미나를 열었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 떠났던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이균영이 두고 간 많은 책을  읽었고 작품의 배경처럼 남아있는 산과 들판, 그리고 읍내의 거리를 자주 거닐었다. 그와 그의 작품을 생각하면 내가 사는 이곳이 참 따뜻하고 마음이 편해져 옴을 느낀다. 이 또한 그가 나를 불러낸 까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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