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호 국립순천대 박물관장

20세기 중반 이후 한국, 일본, 중국 등으로 이루어 진 동아시아가 세계무대에 재등장하면서 유럽중심주의 세계사 대신에 동아시아중심의 새로운 세계사가 대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큰 주목을 끌었던 책이 미국 학자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이다. 프랑크가 제기한 유럽중심주의 세계사에 대한 비판은 2005년 그가 사망한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
프랑크는 미국 학자 임마누엘 월러스틴의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론”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세계체제론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는 월러스틴과 다르게 근대 유럽중심의 세계체제 이전에 세계체제가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1800년 이전의 세계체제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가 중심부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15-19세기 세계체제의 중심은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 특히 중국 쪽에 있었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그는 아시아가 1750년 내지 1800년까지 인구와 생산측면 뿐만 아니라 생산성, 경쟁력, 무역을 통한 자본 축적 측면에서도 세계경제체제에서 유럽을 큰 격차로 앞지르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프랑크는 1800년을 전후로 하여 아시아가 유럽과의 경쟁에서 밀려난 것은 오히려 그 때까지 경제에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아시아는 아메리카에서 유입되는 화폐를 자금으로 삼아 18세기 상당기간동안 지속되었던 장기 성장국면에 잘 대처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생산과정에 대한 투자와 기술개발에 대거 뛰어 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이에 비해 후발주자인 유럽과 미국은 아시아를 따라잡기 위해 전력투구를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성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말년에 서구의 헤게모니가 약해지면서 아시아가 다시 세계의 중심으로 부각되고 있다고 파악했다. 그는 아시아의 재등장 과정에서 일본을 중시했던 폴 케네디와 다르게 중국을 중심에 놓았다.
프랑크의 리오리엔트는 그동안 무시되어왔던 아시아를 세계사 속에서 복원하고, 유럽중심주의 세계사의 허상을 폭로함으로써 유럽중심주의 세계사인식을 극복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동시에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비판하는 프랑크의 시도는 몇 가지 점에서 보완해야 할 문제점을 안고 있다. 프랑크의 새로운 시도는 다음의 세 가지 문제점들을 해결 할 수 있을 때 보다 튼튼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연구방법론과 관련하여, 한 지역보다 세계전체를, 근대라는 특정시기보다 전체시기를, 그리고 정치, 군사, 외교, 문화보다 경제 분야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프랑크 주장의 설득력이 떨어지고 있다. 보다 총체적이고 균형있는 접근이 필요하다.
둘째, 프랑크는 기본적으로 세계사를 다양성속에서 통일성을 보려고 했기 때문에 특정 지역만을 우대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아시아를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아시아 특수주의”를 야기할 우려가 크다. 또한 아시아를 분석하는 가운데서 중국을 중심으로 분석이 이루어지면서 만주지역, 한국 등이 거의 다루어지지 않으면서 실제로 “중국 중심주의”가 나타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아시아 이외의 다른 세계지역 역사의 중요성 인정하면서 지나친 중국 중심주의를 탈피할 필요가 있다.
셋째, 프랑크의 유럽중심주의 비판은 현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내적 구조 변혁과 결합되지 않을 경우 현재의 신자유주의 자본논리를 강화시킬 소지를 안고 있다. 프랑크는 유럽중심의 근대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비판하면서 일본이나 중국 등 동아시아로 세계체제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의 극복 방안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극복해나가려는 노력이 없을 경우, 프랑크의 분석처럼 동아시아가 세계체제의 중심이 되어, 권위주의적 정치체제가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에 기초한 동아시아를 지배하게 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 유럽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제국주의적 팽창과정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 내부의 계급적, 구조적 모순을 해결할 방안을 동시에 모색해야 한다는 비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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