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성 호 국립순천대학교 박물관장

유럽중심주의 세계사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가 2000년대 이후 한국서양사학계에서 개별적인 차원과 집단적인 차원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1990년대 중반에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 유럽중심주의 세계사 비판과 관련하여 검토되었다. 본격적으로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비판하기 시작한 시기는 2000년대 들어서부터이다. 2000년대 초 『역사비평』에 실린 이민호의 글은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비판하는 봇물을 여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에 여러 연구자들과 한국서양사학회 등이 다양한 각도에서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비판하고 있다.
한국에서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비판하는 작업은 자체 연구 축적이 적었기 때문에 한국 밖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던 관련 비판 연구 성과를 소개하는 데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외국 이론들이 지니는 ‘지정학적’ 성격과 위치를 우리 입장에서 확인해나가야 한다. 미국, 유럽, 라틴아메리카, 일본, 중국 등에서 형성된 이론들은 나름대로의 지정학적 맥락이 있을 수밖에 없다. 유럽중심주의 세계사에 대한 미국 역사학계의 비판은 유럽의 역사적 역할을 축소시켜 미국의 세계적 패권을 정당화하려는 수단일 수 있다. 유럽에서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비판하는 것은 쇠퇴하는 유럽입장에서 자신을 세련되게 합리화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중국이 중국 중심 세계사를 강화하는 것은 이전의 중화주의 세계질서로의 회귀를 꾀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고구려사 문제와 만주지역의 만리장성 연장조작 문제로 한중 정부와 역사학계 사이가 불편해지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탈아입구(脫亞入區)’를 주장하면서 유럽에 붙으려고 했던 일본이 다시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동아시아 입장에서 비판하는 데 앞장서려 한다. 2009년 5월에 오사까 대학에서 열린 아시아 세계사학회 초대 회장인 신고 미나미주카는 창립대회 개회사에서 아시아 역사가들이 지구적, 세계적 관점에서 역사를 보는 것을 가로막는 민족사 담론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차원의 폭넓은 역사를 복원하자고 제안하였다. 민족사담론은 19세기 후반의 산물이고, 아시아 내 민족 간 상호교류를 막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족사 담론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은 일본의 식민지를 경험한 한국의 역사가들에게 부담없는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 아랍, 라틴 아메리카 같은 새로운 지역을 강조하는 특수주의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반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근본적으로 어떠한 특수주의에 지나치게 매달려서는 안된다. 그러나 구미중심의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출현한 제3세계 지역의 특수주의는 독자적 대안을 찾아가는 과도기적 상황에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한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근대 유럽이 지닌 모든 것을 부인하는 역편향인 옥시덴탈리즘에 대해서도 조심해야 한다. 근대 유럽이 이룩한 성과가 과장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근대 유럽이 낙후된 중세에서 새로운 근대 세계의 중심으로 성공한 원인과 과정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유럽이 승리한 진정한 이유를 알아야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 역사학계는 유럽중심주의를 넘어 세계의 주요지역을 다 포괄하는 진정한 세계사를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 먼저 유럽을 유럽 자체만이 아니라 유럽 주위와의 관계 속에서 유럽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아야 한다. 유럽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있는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상을 지녀서, 주변의 문명과 지속적으로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아왔다. 따라서 유럽과 유럽 주위 문명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 대한 소개와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지금까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유럽 밖에 있는 주요 세계역사와 문명을 균형있게 소개할 필요가 있다. 아프리카, 서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동유럽, 남북아메리카 등에 대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연구와 교육이 필요하다. 특히 무역의존도가 높고 세계적인 경제활동이 활발한 한국에서 이러한 지역학 연구는 현실적으로도 국가와 기업 활동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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