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序歌) 詩 이근배

가을의 첫 줄을 쓴다

깊이 생채기 진 여름의 끝의 자국

흙탕물이 쓸고 간 찌꺼기를 비집고

맑은 하늘의 한 자락을 마시는

들풀의 숨소리를 듣는다

금실 같은 볕살을 가슴에 받아도

터뜨릴 꽃씨 하나 없이

쭉정이 진 날들

이제 바람이 불면

마른 잎으로 떨어져 누울

나는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과 산다는 것의

뒤섞임과 소용돌이 속에서

쨍한 푸르름에도

행궈지지 않는 슬픔을

가을의 첫 줄에 쓴다.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영화 '글루미선데이'가 생각나는 가을이다. 쓸쓸함과 우울함은 가을에 잘 어울리는 단어다. 물론 적당한 우울은 오히려 정신건강에 이롭다. 다만 우울증은 경계해야 한다. 가을에 외로움을 타지 않는 사람은 감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고려시대 시인 정지상은 떨어지는 낙엽하나를 보고도 이런 시를 읊었다. 庭前一葉落 (정전일엽락) 뜰 앞 나뭇잎 하나 떨어지니, 床下百蟲悲 (상하백충비) 마루 밑 온갖 벌레들 슬피 우는구나. 절창이 따로 없지 싶다. 생각은 종종 우리들을 속이지만 마음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법이다.

일상도 마찬가질 터. 일상의 품목들을 살펴보면 소소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눈물, 상처, 오해, 배신 그리고 원초적인 외로움 등이다. 하지만 이런 일상들이야 말로 삶의 근간을 이루는 재료들이다. 글쓰기를 잠시 멈추고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이 시리도록 푸른 게 금방이라도 푸른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져 내릴 것만 같다. 어디 시린 게 가을 하늘 뿐일까. 며칠 전에 내린 가을비에 속절없이 떨어져 내린 낙엽들과, 밤새 울어대는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도 가슴 시리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더러는 마음의 가출을 꿈꾸며 시도 때도 없이 낯선 곳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가을이라는 낱말 속에는 외로움의 냄새가 유독 강하다. 해질녘 바람에 쓸려 다니는 낙엽을 보고 외로움을 타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다. 삶은 어쩔 수없이 외로움을 주식으로 삼게 마련. 이런 사실을 일찍 깨닫게 되면 미래가 두렵지 않는 법이다. 시인은 잃어버린 것과 산다는 것의 뒤섞임 속에서 행궈지지 않는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사람이 외로운 건 전부를 걸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어느 시인이 노래했다는데,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루가 다르게 바람의 무게가 다른 요즘이다. 이제는 당신이 여물어져야 할 때다.

홍봉기 기자

김태균  -

<저작권자 © 광양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