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초입, 열어둔 창문 사이로 스며든 바람의 느낌이 좋다. 길고 무더웠던 여름날 시원한 바람 한 자락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계절은 어느새 바람의 느낌을 몰고 와 가슴 깊이 파고든다. 자연의 순리를 순응하며 또 하나의 새로운 계절 앞에 다가선 마음이 겸손해 지고 감정 또한 잦다.

그래, 계절병이다. 나는 해마다 찾아드는 가을맞이 신고식을 심한 가슴앓이로 혹독한 홍역을 치른다. 흔히들 봄을 탄다고 하는데 나는 가을을 많이 탄다. 가을에는 불현듯 떠나고 싶고 막연한 그리움과 동경에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깊은 밤 불면증에 뒤척거리며 수많은 생각들을 이어 가는데 고층아파트 베란다 창틀에서 풀무치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조심조심 다가서는데 놀래라! 작은 풀무치 한 마리 창틀에 앉아 츠르르 츠르르 가을을 짜고 있다. 얼마만이던가?

어린 시절 가을의 문턱에 들어설 때면 밤마다 들려오는 풀벌레 울음소리가 나는 좋았다. 섬돌 밑 돌담 밑에서 숨어 우는 풀벌레소리, 다양한 소리로 하모니를 이루는 풀벌레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사색에 잠기기도 했고 특별한 연주회에 초대받은 느낌처럼 그저 기분이 좋았다.

풀무치는 밤새도록 아파트 창틀에서는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관객은 없지만 나 혼자 듣는 풀무치 변주곡에 황홀한 밤이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무대, 세상에 이 보다 더 귀한 음악회가 있겠는가? 스르르 잠이 들어 깨어보니 아침이다. 지난밤 울어대던 풀무치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뒷산에서 울어대는 뻐꾸기 소리가 또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4년 전 마로산성이 있는 창덕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우리집 뒤란은 다 정원이다. 창문을 열면 펼쳐지는 나만의 정원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들, 누구나 느낄 수 없는 나만의 특권을 부여받고 행복에 겨워 계절마다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한다. 소쩍새, 뻐꾹새, 종달새, 다양한 풀벌레소리 가끔씩 길을 잃고 무단으로 침입한 벌레들, 이 모든 것들이 나는 다 소중하고 함께 할 수 있음이 감사하다. 가끔씩 힘들고 지칠 때면 뒤란에 나가 마로산성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자연의 소리는 영혼을 깨우는 소리다. 맑고 고운 음색은 잠자는 뇌에 감성을 전달하고 잠 못 이룬 밤 청량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순간 잊고 지냈던 하찮은 것들도 가을에는 그들로부터 모두가 다 성숙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된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가을을 사색의 계절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길고 힘들었던 여름을 잘 견뎌 왔기에 더 성숙한 모습으로 되돌아 볼 수 있는 성찰의 시간임이 틀림없나 보다.

지치고 힘들었던 여름나기를 풀무치소리로 달래며 위로하며 “잘 견뎌 냈다고 수고했다고.”나에게 쓰담쓰담 해주며 위로 받고 싶은 가을 초입, 바람 한 자락 휙~ 지나간다.

아~!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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