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봉 애 시인

▲ 송봉애 시인

쉼 없이 달려온 시간 위로 어느새 나뭇잎은 낙엽이 되어 뒹굴고 나는 낙엽위에 다 새길 수 없는 무수한 언어들을 긋고 지우며 또 하나의 계절을 떠나보낸다. 자연의 엄숙한 순리지만 순종하지 못하고 반항하는 나는 심한 계절병을 앓고 말았다. 해마다 노란 은행잎이 떨어질 때쯤이면 찾아드는 병, 그 병은 어디론가 홀연히 떠나고 싶은 병이다.

뉘엿뉘엿 달리는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낯선 풍경들과 마주하며 내 안에 나를 어루만지고 싶고, 홀로 길을 걷다 향기 나는 찻집에 들려 차 한 잔을 마시며 그리운 이들을 추억하고 싶다. 거리를 걷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과거로의 시간 속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나를 발견하며 화들짝 놀라고 싶은 계절, 아무도 걷지 않은 곡선의 길을 홀로 걸으며 낙엽위에 아름다운 언어의 빛깔을 새겨 두고 싶은 계절병의 처방약이 언제쯤 실효성을 거두게 될지 나는 오늘도 막연한 동경을 한다.

쉰 두 줄기 샛강들을 얼기설기 엮으며 달려왔던 시간들, 노란 은행잎만큼이나 아름다운 빛깔을 우려내지 못한 샛강위로 땅 그림자가 드리운다. 이젠 두터운 외투를 입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매섭게 몰아치는 한파를 견뎌내야 하는 또 다른 계절의 문 앞에서 나를 꽁꽁 동여매며 황금색은행나무 부처가 되고 싶다. 세상의 헐거운 짐들도 내 안에 자리한 아집과 경계의 빗금도 다 털어내 긴~ 겨울잠에 들고 싶다.
떠나온 길을 뒤돌아보며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 여학교 때 읽었던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를 기억해 낸다. 가난한 예술촌 화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희망을 잃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이웃에게 밤새 비바람에 떨어지는 담쟁이 잎새를 벽에 그려 넣어 새로운 삶의 전환을 맞이하게 한 소설이다. 담쟁이는 혼자 벽을 넘지 않고 여럿이 손잡고 수천 개의 잎들을 끌어 올린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는 수천 개의 잎들을 끌어 올리지도 못했으며 베어민처럼 벽에 담쟁이 잎새도 새기지 못했다. 이젠 그 길 위로 노란 은행잎만 뒹굴고 있다.

은행잎이 떨어진 거리를 걷는 것은 오직 나를 비우고, 시기와 과욕을 버리며 가볍게 걸으라 했다. 거리를 울리는 진혼가를 들으며 경건히 고개 숙여 경배하고 싶은 계절, 내안에는 많은 상처의 언어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때로는 올 곧은 성격 때문에 타협하지 못하고 비우지 못해 바스락거리는 낙엽처럼 쌓여만 갔던 시간들, 나로 인하여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속에 이제 저~ 황금색 은행나무 부처처럼 모자를 벗고 합장하며 기도한다. 모든 상처의 언어들이 훨훨 날아가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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