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詩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는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사랑의 정거장에서 잠시 쉬어 가라

사랑을 잃으면 다 잃는다는 말이 있다. 삶의 존재이유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밤은 늘 짧은 법이다. 사랑은 바람 같아서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그 종착역을 모른다. 혹자는 마음이 사랑의 종착역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누구는 영혼이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사랑에 전체를 배팅하게 된다. 하지만 사랑은 워낙 이중성이 강해 악마를 천사로 또는 천사를 악마로 만들기도 한다.

불꽃같은 사랑은 쉽게 찾아오지 않지만, 우리는 늘 사랑을 찾아 가출하는 상상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 가끔씩은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무관심이라는 옷으로 치장을 하기도 하지만, 사랑은 재치기와 같아서 언젠가는 드러나고 만다. 기형도 시인은 이 시를 마지막으로 게이들이 즐겨 모인다는 어느 영화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어쩌면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했다는 듯이 “잘 있으라”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인생은 빈집(필자 생각에 무덤 속)에 갇히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남기고 홀연히 세상을 떠난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염세주의 철학자였던 쇼펜하우어가 생각난다. 그는 삶이란 맹목적인 질주에 다름이 아니라고 보았다. 가끔씩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다.

물론,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해서 삶을 포기해서도 안 된다.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사랑일 수도 있을 테니까. 일상에 지친 당신, 사랑이라는 정거장에서 잠시 쉬어가라. 맹목적인 삶을 극복하는 방법은 역시 맹목적으로 열심히 사는 거다.

홍봉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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