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상 준 소설가/광양고등학교 교장

아침저녁으론 제법 쌀쌀합니다. 얇은 이불을 끌어당기며 새벽을 맞습니다. 이런 즈음에, 가슴 저미게 하는 시 한 편 읽어도 좋으리라, 여깁니다.
여기서부터, ―멀다/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서정춘 <죽편1-여행> 이 시를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시를 쓴 시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게 나을 듯싶네요. 1941년생인 시인은 바로 이웃의 순천 출생입니다. 등단 28년 만인 56살의 나이에 첫 시집 『竹編』(동학사, 1996)을 상재했습니다. 시집에 실린 시도 36편밖에 되질 않습니다.
등단 전부터 시를 써왔으리라고 여긴다면, 1년에 1편 정도의 시를 겨우 썼다는 셈인데, 너무 지독한 과작입니다. 극히 절제된 생산력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그의 절제 속에서 나온 시들 한 편 한 편이 절창이라는 점입니다. 시인의 삶 또한 지극히 기이하기도 하데요. 육십줄에 나앉은 나이에도 후배들과 밤샘 술을 마시는데, 끄덕도 하지 않고 오히려 후배들이 먼저 떨어져나갈 만큼 술꾼으로 노상방료를 함에도 천연덕스럽게 노래까지 내뱉으면서 해대는 품이 영락없는 기인이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시인이란, 원래 그런 면들이 있잖아, 하는 대목과는 또 다르게 느껴지는, 좀 꾀죄죄한 풍모에, 입심 좋은 재담에, 저 나이에도 저렇게 사는구만, 하는 깊은 우수와 서늘한 외로움이 깃든, 주름 깊게 패인 얼굴의 이면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그런 시인이었습니다.
그쯤 하고, 시를 다시 한 번 읽지요. 다섯 줄의 짧은 시입니다. 부제로 달린 ‘여행’이 바로 이 시를 만나는 정곡입니다. 어디서부터 예까지 왔을까, 굉장히 멀게 왔구만, 하는 독백으로도 읽힙니다.
근원적인 물음임을 알 수 있지요. ‘여기서부터’는 달리기를 할 때, 요, 땡, 하면 튀어나가는 출발의 의미를 지니기도 합니다. 삶을 새롭게 반추하는 어떤 계기로써의 시작일 수도 있겠고, 나이 40이 되면서 아, 그늘진 삶이여, 하고 되새김해보는 의미망을 지니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혹은, 못내 아쉬운 이별을 하면서 애인과 걸었던 저 긴 강둑의 끝을 보며 벌써, 이렇게 멀리 왔는가? 하고 하염없이 처음을 그리워하는 부질없음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 여러 의미망을 한데 모으는 ‘―멀다’는 섬뜩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여정도 험난했지만, 앞으로 살아갈 생의 길 역시 순탄하지 않으리라는 뜻이겠는데, 그 살아오는 동안 짊어진 회한과 이제 또 등에 얹어야 할 삶의 편편들이 ‘칸칸마다 밤이 깊은/푸른 기차’ 속에 떼어놓을 수 없는, 도저히 떨치고 갈 수 없는 무거운 화물로 실어져 있습니다. 어찌, 삶의 끝을 스스로 팽개칠 수 있겠습니까. 가야지요. 어둠도 데불고 가야 하고, 때때로 출렁이는 환희의 물결도 맞으면서 이르고자 하는 마을은 ‘대꽃이 피는 마을’입니다. ‘대꽃이 피는 마을’은 정작, 우리 모두의 고향입니다. 아프디 아픈 괴로움 속에서도 고향은 그리움입니다. 한 없이 기쁜 웃음 속에서도 고향은 외롭고 쓸쓸하고 누추합니다.
그렇습니다. 고향은 내가 돌아가야 할 가장 훼손되지 않은 원형의 삶을 지닌 곳이기에 휘청거리는 걸음으로라도 가야 합니다. ‘백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백년’이 걸려도 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백년’은 결국 반드시 가겠다는 굳은 결의입니다. ‘백년이 걸린다’고한들 돌아가서는 아니 될 그런 고향은 없습니다. 고향을 찾는 이들의 무거운 발걸음…고향은, 고향은 끝내 어머니의 자궁입니다. …곧 추석입니다.

김태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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