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출신 최백근 前 사회당 조직 부장

백범 김구 선생 부탁으로 38선 넘어…오로지, 남북이 하나되는 세상을 위해 헌신
최백근에 대한 새로운 역사 조명 시급…그의 죽음에 대해 이제는 진실을 말할 때

사형선고를 담담하게 받아드리고 있는 최백근

역사가 바로 서지 않을 때 민족의 정기는 흐려지게 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지난해 서울고등법원이 억울하게 사형을 당한 故 최종길 서울대교수 유족에게 거액의 배상판결을 내려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박정희 군사독재시절 때 억울하게 사형당한 인혁당재건위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의 결과물이다. 조금 늦은 감이야 없지 않지만 그나마 역사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이고 보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4.19이후 인혁당재건위를 위해 활동하다가 조용수 전 민족일보 사장과 함께 사형을 언도 받은 故 최백근 전 사회당 조직부장만은 아직도 명예회복이 이뤄지지 않고 있어 주변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현재 광양시 태인동에는 최백근 친인척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하루 속히 명예회복이 이뤄지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를 광양시참여연대가 올해 주요 사업의 하나로 다루고 있어 최백근 명예회복에 대한 기대를 갖게 만들고 있다는 점은 무척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곡된 진실 바로 잡아야

올해로 56번째 현충일을 맞았다. 현충일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전몰(戰歿) 장병들의 충렬을 기리고 얼을 위로하는 기념일이다.
이런 현충일에 다시 한 번 생각할 인물이 있는데, 바로 광양시 태인동 출신으로 억울하게 사형당한 최백근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제대로 된 조명 한 번 받아 보지 못하고 아직도 왜곡된 역사의 뒤안길에 방치 된 채 잠들어 있다.

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우리는 다시 입을 열어야 한다. 그게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평생을 태인동에서 거주해 온 최병헌 씨(70)는 당숙 최백근에 대해 남다른 감회를 가지고 있다. “백근이 당숙 때문에 최씨 가문이 연좌제에 걸려 애로사항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한 만큼 왜곡된 진실을 바로잡아 후손들이 당당하게 당숙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노력을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며 속내를 드러냈다. 최병헌 씨는 그동안 홀로 서울망우리에 묻혀 있는 최백근씨 무덤을 찾아다니며 묵묵히 돌봐왔고, 최백근씨와 가장 가까운 친척들을 찾아 당숙의 명예회복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온 장본인이다.

1961년 8월에 열린 '중앙사회당사건'1심 재판정에 나와 피고석에 앉아 있는 최백근. 왼쪽부터 문희중, 유한종, 하태환, 진병호, 이석준, 최백근, 김영옥 등이 앉아 있다.

최백근의 발자취를 따라서
최백근은 1914년 2월20일 전라남도 광양군 골약면에 속해 있던 조그마한 섬 태인도에서 태어났다. 광양은 일제강점에 대항해 의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지역이다.

최백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의병운동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 그는 섬진강 건너편에 있는 하동에서 보통학교를 다녔는데, 그가 보통학교를 다닐 때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는 1932년 보통학교 6학년 때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동맹휴학사건으로 구속된다. 주된 이유는 휴학을 주도하고 유인물을 돌렸다는 것이다.

결국 이 일 때문에 그는 일본 경찰에 끌려가 많은 고초를 당했으며, 심지어 한쪽 고막이 터지는 신체적인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강한 정신력으로 모든 고초를 이기고 1932년 4월에 진주소년원에서 복역한 후 만기 출옥한다. 이런 고초 속에서도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광주고보 (광주서중)에 입학한다. 광주고보에 다니던 그는 당시 진보적 경향을 띠었던 선생의 주선으로 일본유학을 떠나게 되고 와세다대학 전문부(야간부)에 들어간 그는 낮에는 신문배달과 중노동으로 학비를 벌면서 학업을 계속 이어가는 등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현재 중마동에 거주하고 있는 외조카 홍희수(70)씨는 “백근이 삼촌은 보통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항상 새로운 일에 앞장서기를 좋아했고 의협심이 강해 불의한 일은 그냥 두고 보는 성격이 아니었지요. 결국은 박정희 군부의 희생양으로 사법살인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조직 재건에 앞장
최백근은 광주고보 출신 선배들이 조직한 비밀독서회에 가담해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사회주의사상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그러나 독서회가 발각되는 바람에 선배들이 체포되거나 숨어 다니는 신세가 되면서 끝내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배움에 대한 그의 열정은 다시 서울외국어전문학원으로 발길을 돌리게 된다.

가까스로 학원을 졸업한 후 고향에 돌아온 그는 일본유학 중에 알게 된 선배들과 교류하게 되는데, 그들은 1930년대 초 일제의 탄압을 받아 해체된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조직을 재건하려는 비공개조직을 결성해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이 모임에 하부 조직원으로 참가하게 되지만 이 조직도 결국은 일제에 발각돼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희생을 치르면서 해체되고 만다.

경기도 구리시로 이장한 최백근 묘(사진제공 통일뉴스)

좌우합작을 위해 삼팔선을 넘고
다시 혼자가 된 최백근은 행상을 하며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일제의 징병정책이 강화되자 잠시 지리산으로 몸을 피하기도 했다. 당시 지리산에는 징용을 피해 들어온 조선 청년들이 상당수 살고 있었다.

그는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도 역사와 한문을 독학으로 공부하는 등 한 순간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해방을 맞아 잠시 고향으로 돌아와 머물렀지만, 진보적인 성향이 워낙 강해 다시 광주로 떠난다.

광주에는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있었는데 광주고보를 다녔던 친구들이 함께 일하자고 그를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큰 꿈과 활동을 위해 서울로 올라간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여운형 선생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여운형에게 깊이 매료돼 학병동맹대회, 청총결성대회를 따라다니면서 여운형의 연설을 빠지지 않고 듣기도 했다. 그리고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즉 임시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으며, 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민주주의민족전선결성대회에 서울시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최백근은 매우 큰 실망감을 받고 잠시 좌절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이 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그는 ‘오직 좌우합작만이 민족이 하나가 되는 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으나 이마저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 그리고 박헌영 세력의 탄압과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처럼 혼란한 가운데 그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남북 협상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던 1948년 3월19일 마침내 38선을 넘게 된다.

 

최병헌 씨가 과거를 회상하며, 당숙인 최백근 씨가 살았던 생가 터를 설명하고 있다.

김구선생님의 연명서한 전달
그가 38선을 넘게 된 주된 이유는 딱 하나였다. 누군가 나서서 남북한이 갈라지는 것은 막아야한다는 사명감 하나 때문이었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최백근밖에 없었다. 그

는 김구선생님의 부름을 받게 되는데 남북한 지도자회의, 김구·김규식과의 연합을 촉구하는 백남운, 장건상 등 근민당 지도부의 연명서한을 전달할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이렇게 중차대한 사명을 부여 받은 최백근은 북한 간부들을 만나 남북지도자협상회의 소집 문제와 민전, 근민당, 김구·김규식 세력과의 연합문제에 대한 논의를 끝내고 북조선로동당이 백남운, 장건상 등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무사히 남쪽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는 주로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에 망라된 정당 사이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그러던 중 또다시 6·25전쟁이 터지자 그는 해체된 근민당 조직을 복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등 오로지 하나 된 민족 통일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9월28일 서울이 수복되자 북쪽으로 올라갔던 그는 백남운의 허락을 받아 1952년 12월 무렵 또다시 38선을 넘었으나 경남지방의 당 재건 임무를 띠고 밀파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리고 대구와 춘천형무소에서 복역한 후 1955년 2월14일 만기 출옥하게 된다.

역사적인 재조명 받기 시작
하지만 출옥 후 그가 누린 자유도 잠시, 그는 1961년 1심에서 사형이란 극형을 언도 받게 된다. ‘2·8경제협정 체결 반대’, ‘남북경제교류 주장’, ‘민족통일을 반대하는 외세 퇴거’ 등의 주장과 이 주장을 선전하고 선동한 행위가 ‘반국가행위’로 규정됐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김구 선생님의 남북협상 참가를 유도한 장본인’이란 혐의도 추가로 포함됐다. 그는 상소했으나 11월8일 혁명재판소는 최백근의 상소를 기각, 사형 판결을 내리고 이어 1961년 12월21일 오후 4시 그는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말았다.

그의 유해는 얼마 동안 서울시 조계사에 안치되어 있다가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경기도 구리시로 이장해 정식적으로 그를 추모하는 등 조금씩 빛을 보며 역사적인 재조명을 받고 있다. 물론 그가 사형을 당할만한 아무런 혐의가 없었지만 군사 독재를 내세우던 박정희 체제 앞에서는 그도 어쩔 수 없는 죄인이 돼 억울하게 스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써온 흔적을 알 수 있는 최백근 묘비명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구호 만들어 앞장
최병헌(70세)씨는 이렇게 증언한다. “당숙께서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셨지요. 그리고 늘 자주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그분의 명예가 꼭 회복이 되도록 후손들은 물론 광양시민들이 나서야하지 않겠습니까? 평생 조국을 위해 헌신해 왔는데, 아직도 명예가 회복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너무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도 종종 쓰이고 있는 대표적인 통일 구호인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도 사실

은 최백근이 만든 구호다. 이제 광양시민들이 힘을 합쳐 그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앞장을 설 때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일제 때 해방운동을 위해 헌신 했던 역사적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그를 잊어서는 안 된다. 최백근은 묘비명에 쓰인 글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해서는 안 되고 사람이 사람을 수탈해서도 안 되며 나라가 외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분단된 나라가 자주 민주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최백근 동요

바다의 아버지

엄동설한 추운 날의 이른 새벽에/기적소리 들려오면 울아버지는/조그마한 배타시고 윤선에가죠/쌀가마니 실어내려 열번스무번/선창가에 쌀가마니 산과 같아도/울아버지 실어내신 그 쌀이라도/오늘 아침 우리집엔 양식이 없어/울어머니 걱정하며 쌀꾸려갔죠/갈매기기 떼 울며 나는 바다우으로/저녁 노을 빛을 실고 울아버지는/고기 많이 잡아갇고 돌아오셔도/오늘저녁 우리집엔 파래김치뿐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발표된 최백근 동요. 홍봉기 기자 풀이)

홍봉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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