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들통나고 말았지

집을 떠나 어느 생소한 간이역에

짐짝처럼 부러지고 나서야

그 동안 확실치 않은 그놈의 정체에 대해서

함부로 지껄여 왔음을

구겨진 광고전단지들이 헤매 도는

밤 깊은 플렛폼에 서서야 알았지

암담하고 참혹하다고 믿어왔던 과거도

제법 따뜻한 온실이었음을

내가 아는 상처는

심심할 때 뜯어먹는 말랑말랑한 식빵이었음을

내가 아는 절망은

귀나 목에 치렁치렁 매달고 다니는

장신구 였음을 알았지

싸늘한 역 대기실에서 바짝 다리 오그리고 자는

나무의자보다 황량한,

개찰구 바닥에 얇게 짓이겨진 담배 꽁초보다 초라한

내 가슴 답답하게 짓눌러왔던 젊음은

그보다 더한 아픔이었다고 우겨댈수 없었지

간이역의 둥근 벽시계가 발을 동동 구르며

내일의 사막으로 질주하는 동안

집으로 가는 열차를 잘못 갈아타고

어느 낮선 무심역에 버려져 있는 동안

절망을 어린애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동안

꾀병처럼 감쪽같이 날이 새 있음을 알았지

이기와 시인

당신은 어느 간이역에서 서성대고 있는가?

사춘기 시절에 나는 실존주의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 의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게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알기나 했겠는가만, 나름대로는 밑줄을 그어가면서 열심히 읽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 나이 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삶의 부조리에 눈을 떠가는 때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절망과 상처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됐다.

왜냐하면 진짜 절망 앞에 서 본 사람은 그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는 너무나 많은 절망과 상처들이 함부로 노래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꾀병은 언젠가는 들통이 나고 마는 법이다. 마음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아픔은 다 사이비 아픔에 불과한 법이다. 물론, 우리들 스스로도 조금씩은 알고 있을 테다. 끝내 자신이 원하는 삶을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채 마음의 병만 앓다가 그렇게 세월을 방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일까? 어느 간이역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당신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홍봉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