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성 수 하늘씨앗교회 목사

가을이 여물어가고 있다. 햇볕도 무척 짧아진 것 같고 풀벌레들 소리도 애처럽게 들리는 게 이제는 정말 가을이구나 싶다. 아직도 짝짓기를 마치지 못한 벌레들은 얼마나 애가 탈까? 사람들 귀에는 그저 아름다운 노래 소리로 들리겠지만, 벌레 입장에서 보면 처절한 울음에 다름이 아니리라.

고려시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정지상은 정전일엽락(庭前一葉落), 백충상하비(百蟲床下悲).라고 읊었다. ‘뜰 앞에 있는 나뭇잎하나가 떨어지니 책상아래에서는 모든 벌레가 슬피운다'는 뜻이다. 가을은 그렇게 쓸쓸하고 우수에 젖어들게 만드는 계절이다. 그래서 ‘근심 수(愁)' 자에는 ‘가을 추(秋)' 자가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모름지기 가을에는 추수하는 계절이다.

자연이나 사람이나 추수할 날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성경에 가라지와 알곡에 관한 비유가 나온다. 같은 인생이라는 밭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여물어져 가도 결국 추수 때는 가라지와 알곡이 나눠지게 된다는 비유다. 겉으로 보기에는 알곡이 쭉정이 같고, 또 쭉정이가 알곡처럼 보일 때도 많지만 마지막 인생을 결산 할 때는 그 사실이 확언하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성리학의 대가인 주자 선생님도 “춘불경종추후회(春不耕種秋後悔)라며 후세 사람들에게 교훈을 남기고 있다.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는 뜻이다. 뜨거운 햇볕이 싫고 비바람이 싫어 자신을 숨긴 과일은 결국 좋은 상품이 되지 못하고 버려지게 되는 법이다.
인생이라고 해서 뭐가 다를까. 사람도 살아가다보면 별별 일을 다 겪게 된다. 어떤 때는 황당한 일을 만나기도 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 어디에도 하소연할 때가 없을 때도 있다. 이게 인생이다.

그래서 나는 늘 人生을 忍生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렇다고 참는 게 능사는 아니지만, 참지 못하고 서둘다가 인생을 망친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심지어 인일시지분(忍一時之忿)이면 면백일지우(免百日之憂)라고 했다. 잠깐 동안의 분을 참으면 백일동안의 근심을 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제 내 나이도 곧 70을 바라보고 있다. 세상사 뒤돌아보면 모든 게 꿈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나이가 되면 누구나 그런 심정이 들겠지 싶다. 그런 줄 알면서도 젊은 시절에는 왜 그렇게 꿈도 많고 열정도 많았는지 모른다. 하긴, 젊다는 자체가 그런 것 아니겠는가. 불타는 열정이 없다면 어찌 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비록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동안은 뜨거운 열정에 자기를 맡길 수 있어야 인생의 추수기 때는 탈곡기 소리가 두렵지 않은 법이다.

이 글을 마치고 창문 밖을 내다보니 가을 햇살이 더욱 여물어 가는 것이 보인다. 나뭇잎도 이제 서서히 떨어질 준비를 하는지, 하루가 다르게 변색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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