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는 오늘이 12월 28일이다. 이제 3일 후면 다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이럴 때마다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벌써?“라는 한숨 섞인 말이 튀어나온다. 거의 본능적이다. 아마 지금 마지막 남은 달력 앞에서 유서를 쓰는 기분이 드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한때 유서 쓰기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죽음을 체험해 봐야 한다면서 관 속에 몇 분씩 누워있기도 했다. 그럴 때 드는 기분, 죽음이라는 막막하고 쓸쓸하고 두려운 그 죽음이 조금은 친절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하지만 생명이 있는 것들은 여전히 살고자 하는 본능이 죽음보다 강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시간은 생명을 침식해 들어오면서 끝내 죽음이라는 부고(訃告)를 알린다. 누군가 말하기를 사람이 죽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세상에 미련이 많이 남아서라고 했다.

언젠가 노트에 조선시대 실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덕무가 했다는 말을 적어 두었다. “寡慾者 死無餘戀 生無浪憂(과욕자 사무여련 생무랑우)”즉, ‘욕심이 적은 자는 죽더라도 미련이 없고 살더라도 쓸데없는 걱정이 없다’는 뜻이다. 욕심만 줄이면 될 것 같은데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지나치게 많은 욕심을 부린다는 점이다.

이솝우화에 보면, 어느 개 한 마리가 고기를 물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우연히 물가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컹컹 짓다가 입에 물고 있던 고기마저 놓치는 어리석은 모습이 나온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개의 행동이 바로 우리들 모습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현재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 만족하거나 감사하기 보다는 남의 손에 들어 있는 떡을 욕심내는 것이다. 아무리 고등교육을 많이 받고 또 종교에 귀의한다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철인은 내가 신과 가까운 것은 욕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참으로 일리가 있는 말이지 싶다. 신은 탐욕스러운 마음에는 거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를 축적하는 비결은 부를 축적하지 않고 오히려 탐심을 가라앉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나이가 조금씩 들어갈수록 이덕무가 했던 말이 ‘맞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 아무리 많은 욕심을 부리고 또 그 욕심을 소유한다고 해도 삶의 이면을 들여다 보면 다들 쓸쓸하고 침울하다. 목숨을 바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내 마음과 달라 수시로 다투는데 그럴 때마다 외로움은 가슴을 파고든다.

그 많은 책 속에서 그 많은 시어 속에서 그 많은 영화 속에서 아무리 주옥같은 문장과 노래가 있다고 해도 끝내 내가 전하고 싶은 것들은 하나 같이 비껴가고 만다는 자괴감이 수시로 목울대를 타고 넘어온다. 그래서 아무리 죽도록 사랑을 한다고 해도 너무 크게 기대하지 말라고 했는지 모른다. 그만큼 실망도 크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거의 절망적인 수준으로 삶이 두 배로 힘들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일상을 떠나야 한다. 혼자면 더 좋다. 그렇게 낯선 곳에서 낯선 풍경과 낯선 사람들은 만나면 고갈된 마음에 다시 사랑이 찾아오고 희망이 찾아오는 것이 느껴진다. 인생은 참으로 역설의 연속이다. 흔히 우리는 ‘아이러니’라고 말을 하지만, 아이러니를 우리 식 문장으로 풀면 ‘왜. 이러니?’가 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번 ‘왜 이러니’를 내뱉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여행이라고 해서 멀리 비행기를 타고 물 건너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새로운 발견이 있는 곳이 가장 좋은 여행지인데, 내가 발 딛고 매일 살아가는 일생이 가장 좋은 여행지다. 일상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멋진 나라에 간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매일 마주하는 일상과 하나가 되는 그 순간에 나는 보람을 느낀다.

신선한 발견은 나 아닌 것들에게 따뜻한 애정의 눈길을 줄 때 자신의 내부에서 재탄생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거듭나기다.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각도로 다시 볼 때 낯익은 것들이 전혀 다르게 다가오게 된다. 흔히 우리가 한바탕 울고 나면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 그렇다. 사람이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것도 다 그런 이유다. 지리멸렬한 인생을 조금은 다르게 살아보고 싶은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속상하다는 제스처가 바로 술잔을 들고 넋두리를 하는 것이다.

그래 다들 그렇게 속을 상하면서도 한 해를 잘 살아왔다. 그게 보편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이다. 삶은 서로의 한숨을 나누고 거들어 주는 것이다. 당신의 아픔과 나의 아픔을 서로 교환하는 것이 인생인 셈이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 일란성쌍둥이인지 모른다. 85억 인간이 나의 아바타요 분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되면 나의 일처럼 마음이 아픈 것이다. 새해에도 어제의 한숨은 크게 줄어들지 않겠지만, 그 한숨이 1인칭의 한숨이라 아니라 2인칭의 한숨이라면 얼마나 의미가 크겠는가.

물론 한숨 쉬는 횟수를 줄어야겠지만, 타인의 아픔에 동참하는 한숨이라면 오히려 아름답다는 생각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다 보니 글이 길어지고 말았다. 미안하다. 새해에도 우리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자. 그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살겠다고 마음이라도 먹어 보자.

홍봉기 기자  lovein2986@hanmail.net

<저작권자 © 광양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