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벽을 보니 2023년을 알려주는 달력이 마지막 한 장만 남아 있다. 달이 바뀔 때마다 한 장씩 뜯어냈는데 끝내 12월 한 장만 남았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장의 한 켠에 조그맣게 내년 1월이 표기되어 있다.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흐른 것이다. 23년이 가고 있다.

시간이 가서 세월이 흐르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자꾸만 딴지를 걸려고 한다. 그것도 철들고 나서부터 계산해 봐도 어림잡아 30여 번을 넘게 겪어봐서 익숙할 것인데도 익숙해지기를 일부러 거부하려는 듯 반대로 느껴가고 있다. 익숙해하지 않고 불편해 한다. 예전에는 한 해가 가도 서운한 줄 몰랐고 새해가 와도 반가운 줄 몰랐다. 그런데 나이 좀 들어서 그런지 서운하다는 둥, 왜 이리 세월이 빠르게 가는지 모르겠다는 둥 하며 푸념섞인 하소연을 해댄다.

맑고 높은 가을의 푸른 하늘이 황금 들판 위에서 마냥 즐거워 구름 둥둥 띄우며 놀던 시월이 어제인듯하고 너무 무더워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던 여름이 길고도 긴 장마를 데리고서 온종일 꾸물대던 그 날들도 그제인듯 한데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산새 소리 가득한 12월이 되었다.

아침이면 창문을 열어 얼마나 눈이 왔을지 알아보는 강원도 산골 사람들의 하루시작이 나의 아침과 사뭇 다르지만 나도 살며시 추워지려 하는 겨울바람에 지난 겨울 입었던 두둑한 작업복과 양말을 일어나면서 신경써 챙겨 본다. 12월이 되니 늦가을인듯 쌀쌀하고 초겨울인듯 추워만 지는데 아직도 노랗게 물들어 있는 은행잎은 애써 가을을 지키려는듯 거리 여기저기에서 쌀쌀해진 바람결에도 굳굳하고 그 나무아래 떨어져 뒹구는 낙엽들은 겨울이 다가옴을 인정해야만 하는듯 수북하다.

이런저런 한 해의 숱한 이야기들은 예전의 그 해들처럼 자그마한 그리움에 커다란 아쉬움을 우리들 가슴 가득 채워 놓고서는 지는 석양의 노을 마냥 여울여울 거리며 사라지려 한다. 힘들어도 기어이 이겨냈던 올해의 우리들이 모두 대견하니 그냥 보내지 말고 함께 고생한 동료들과 술한잔 걸쳐도 좋을듯하다. 그러니 망년회로 모여 서로를 다독이며 내년에도 잘해 보자며 큰 소리에 건배를 불러야 할 것 같다. 세계적인 경기 불황으로 인한 경기침체가 올해로 끝날 것같지 않으니 다시 한번 더 뭉쳐 이겨내야한다. 그래서 내게는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다정스러운 부탁도 곁들여서 말이다.

누구인들 한해를 시작하면서 마음 속으로 나마 세웠던 계획과 작고 소박한 소망이 없었겠는가. 그런 계획과 소망이 한 장 밖에 없는 달력을 물끄러미 볼 때 많이 부족한 것 같고 어려울 것 같이 느껴져도 너무 실망하지 말자.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하며 작은 만족이라도 해보자. 바라던 것에 많이 모자라도 그게 어디인가 하며 자신을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자. 사실 우리들이 바라는 것들은 습관적으로나마 높게 설정되는 경향이 더러 있다.

굳이 그렇게 높이, 그렇게 많이 안 하더라도, 그 길이 아니더라도 행복할 수 있음도 인정해 보자. 그리고 가끔은 내 계산보다 내 삶이 더 옳을 때도 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보다 그저 내 생활의 형편대로 살다보니 나중에는 내가 생각하고 계산했던 것 보다 더 나아 지는 경우 말이다.

새옹지마인 경우들이 의외로 많고 내게도 있을 수 있다. 모든 일이 다 그럴 수는 없지만 천년을 넘게 살아온 이 말은 나이가 말해 주듯이 그만큼 일리가 있다는 뜻일 게다. 우리는 기껏 해봐야 70년 인생이니 새겨 들어야 할듯하다. 내 계획과 이론보다 나를 바라보는 이와같은 인생어(人生語)가 더 맞을 것이다. 인생지사새옹지마(人生之事塞翁之馬)라 했다. 가만히 따져보면 그 속에 은근한 희망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이 생기는데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말고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기다리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설마 하며 말하는 이들도 있을 테지만 믿고서 살다보면 맞다고 느낄 때가 있으리라. 나는 경험해봤다. 살아보니 새옹지마도 있고 전화위복(轉禍爲福)도 있다는 것을.

지금 조금 힘들고 그래서 올해는 영 아닌듯 하다면 아직 한 달이 남았으니 기다려도 보자. 그리고 다가올 새해를 기대해 보자. 내게 없는 것 보다 내게 있는 것이 더 많을 텐데 우리는 항상 내게 없고 남보다 못한 것만 따지는 그릇된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경향이 많다. 이쯤해서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을, 못 했던 것보다 이루었던 것들도 한번쯤 따져 보자. 그리고 은연중에 자리잡은 잘못된 분석에 항상 고생해온 자신에 대해서 이제는 너그러운 점수도 줘 보자. 항상 곁에 있어 쉽게 사랑한다는 표현이 어려웠던 아내나 남편 그리고 공부는 안 해도 건강하고 말썽많은 우리 아이들도 한번 안아줘 보자.

마지막 한 달이 귀하게 느껴지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가 있다. 저마다 그 이유는 다를것 이다. 그래도 공통적인 것은 마지막이어서 일게다. 내년이면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어서 굳이 그렇게까지 여길 필요가 있겠냐 하겠지만 이제 가면 다시는 못 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바쁘게, 힘들게 뛰어온 한 해를 잘 정리하고 또다시 시작할 한 해를 준비하는 12월이 되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주위 사람들도 챙겨 돌아 볼 수 있으면 부족한 한 해였을지라도 마음만은 풍성할 수 있지 않을까. 거리 이곳저곳에 반짝이는 성탄 장식이 유난히도 따뜻하게 다가오는 12월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나마 힘든 한 해가 덜 무겁지 않을까. 12월의 성탄절이 모든이에게 평화와 감사로 다가오기를 마지막 달력을 바라보며 소망해보자. 그리고 기대해 보자. 따뜻한 24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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