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던 잎새들이 울긋불긋 꽃단장을 하고 있다. 가을을 준비하는 숲에는 아름다운 향연들이 가득하다. 역시 단풍은 가까이 보다 멀리서 보는 것이 더 아름답다. 인생도 그런 것 같다. 가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성숙함과 결실, 그리고 천고마비로 상징되어 진다. 특히 사계절이 뚜렷하고 황금빛 들녘과 푸르른 하늘을 가진 우리의 가을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대자연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유당공원과 동교 숲의 노거수들도, 광양향교의 은행나무도, 아침, 저녁으로 다니는 옥룡길 가로수들도 지친 몸의 긴장을 풀어가며 입고 있던 잎새에 채색을 한다. 

특히 삼정교에서 백운산자연휴양림으로 진입하는 오른쪽 길목 옛 말을 읍의 은행나무들은 노오란 옷으로 갈아입으며 몸매를 추스러 본다. 옥룡사지의 동백나무숲은 1만여 그루의 동백나무들이 꽃봉오리를 잉태하며 겨울나기를 준비하고 있다. 37세 때 이곳을 선택해서 72세 때 열반에 드신 도선 국사께서는 옥룡사에서 법문을 열고 수 백 명의 제자를 양성하셨다. 당시 신라 왕실을 오가며 신라 제49대 헌강왕에게 876년경 설법을 하였다. 

헌강왕이 궁궐에 머무르며 가르침을 청했지만 옥룡사로 돌아와 참선에 정진하셨고 경보, 계묵, 현하등 걸출한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이는 1478년 조선 성종 때 당시 홍문관 대제학 서거정과 양성지, 강희맹등이 편찬한 동문선의 ‘해동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 비명병서’를 비롯한 고려사, 편년통록, 세종실록지리지등 여러 문헌에 언급되어있는 사실이다. 30년 前 1993년에 귀향하게 된 필자는 옥룡사지 입구에 전답을 구입하였고 1년 후 그 자리에 농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가업을 유지하고 있다. 당시에는 도로가 외길 농로였고 전신주가 없어서 전기를 윗마을 고모님 댁에서 전기선을 이어서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 자리에 그렇게 집착하게 된 것은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옛날  우리 아버님(시아버지)이 항상 이 논을 갖고 싶다고 하셨다. 우리들 에게도 여유가 되면 꼭 논을 사라고 당부하셨단다.” 나는 그 당부가 바로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신념을 가지고 항아리를 하나, 둘씩 사서 모았다. 

그러나 2002년 태풍 루사 때 저지대였던 농장이 물길에 휩싸여 침수되고 항아리 속 간장, 된장, 고추장이 다 못 쓰게 되는 시련에 처했었다. 나는 실의에 빠지기보다 다시 굳센 용기를 내야만 했다. 그때 논의 생김새가 위쪽과 아래쪽이 급경사였고 아래쪽이 푹 들어가 있었다. 마침 하천 정비공사를 하는 현장소장에게 나는 “하천에서 나오는 토사와 암석을 멀리 반출하지 말고 우리 논을 평평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요?”라고 다소 엉뚱한 제안을 했더니 두 세 시간 후 그분께서 “좋습니다.” 라고 대답을 해 주셨다. 

그래서 1500평의 땅을 복토를 하고 석축을 쌓아 튼튼한 지반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십 수 년 후 농장 앞 냇가에 다리가 놓이고 폭풍우에도 견딜 수 있는 굳건한 주변 환경이 되었다. 2023년 가을, 우리 농장 뒤에는 ‘백계산 동백공원 조성사업’이 한창이다. 천연기념물 제489호인 광양 옥룡사 동백나무숲과 연계한 명품‘백계산 동백정원’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공사 진행이 여러 난관에 부딪쳐 10여년을 끌어 오다가 드디어 공사가 시작되고 보니 이것은 사람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보이지 않는 도선국사의 불력으로 일이 진행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고 보니 지난 30년 동안 옥룡사지를 오가며 크고 작은 소원을 옥룡사지에서 염원했다. 그러면 간절하게 부탁한 일을 하나하나 들어 주셨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옥룡사지를 한 바퀴 돌아보고 소망의 샘에서 시원한 샘물을 마시며 자신을 가다듬어 왔다. 

지금 이 순간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지친 사람들, 어둠의 미로에서 의지할 데 없이 외롭고 답답할 때 잠시 시간을 내어서 옥룡사지와 동백나무숲을 천천히 걸어 보자 그러면 등불처럼 다가오는 깨달음과 자아의 길을 만나게 될 것이다. 간절한 꿈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꿈을 꼭 이루어야 할 사람이라면 가을의 신화와 전설을 스스로 만들어 보자. 국화는 가을에 꽃을 피우고 동백은 내년 봄 꼭 건강한 꽃을 피어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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