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비를 보고 싶어 한다. 초록을 풋풋하게 밀어내려 비를 기다린다. 목이 타들어 가는 보고픔이다. 산길을 걷는 나도 땅의 그리움에 공감한다. 하지만 땅은 비가 언제 올 줄을 느낀다. 보고픈 대상을 알고, 만날 때를 아는 기다림은 지치지 않는다. 막연한 기다림도 있다. 낯설고 기약 없는 재회 탓에 숨이 막힌다. 그 답답함은 또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거부하고 싶지 않은 아픔을 끌어오는 것이다. 미지의 그리움으로 가슴을 긁어 생채기를 내는 것이다. 그런 ‘낯선 그리움’은 늘 내 곁에 머무른다.

내가 산을 찾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기리려는 것인가. 군 복무 시절이 떠오른다. 지겹도록 반복되는 훈련 중에 10kg 전투 배낭과 소총을 메고 달리는 훈련이 있었다. 도중에 낙오하면 그 주 토요일에 주어지는 외박을 못 나가는 올가미이기도 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아스팔트 길을 철모를 쓴 채 군홧발로 뛰었다. 반환점을 돌았다. 5Km를 뛴 것이다. 몸의 힘이 빠져나가고 정신마저 몽롱했다. 아스팔트와 물체를 다 녹여버릴 것처럼 으르렁대는 한여름 햇살은 폐를 거의 태워버렸다. 막대기처럼 쓰러지고 싶은 몸뚱이를 지탱하려는 거친 호흡이 마른침마저 삼킬 틈을 주지 않았다. 침을 게거품처럼 입가에 흘렸다.

뛰는 것들은 다 제정신이 아닌데 부대를 향하는 군화 소리만 정신을 잃지 않고 2/4박자에 맞춰 앞으로 나갔다. 눈앞이 흐릿하지만 넘어지면 안 돼. 오른손에 잡힌 소총 끈이 땀에 젖어 끈적거렸다. 쓰러지지 않으려 무언가를 붙잡아야 했다. 그게 소총 끈이었다. 고른 박자를 휘젓는 둔탁한 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누군가 아스팔트에 쓰러진 것이다. 외박 나가면 애인을 만난다고 호들갑 떨던 김상병이었다. 애인과 함께 긴 밤을 보낸다고 벼르던데.

나는 주말에 누굴 만날까. 갈 곳 없고 만날 애인도 없었다. 차라리 쓰러져 버릴까. 안 돼, 내게는 보고 싶은 이가 있었다. 드러나진 않지만 나를 지켜보는 그녀다, 예쁘겠지. 내가 쓰러지면 그녀도 아프겠지. 나를 기다리는 그녀가 실망하면 안 돼. 먼발치에서 나를 끌어 주는 그녀. 얼굴을 그릴 순 없지만 향기를 느꼈다. 토요일에 외박 나가면 만날 거야. 너를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는 거야. 나를 지켜봐 줘. 안아주고 키스해 줘. 내 이름을 불러 줘.

하지만 너를 어디서 봤을까. 언제 보았을까. 너를 토요일에 만나는 거야?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내음를 따라 뛴다. 이대로 너에게 가버리고 싶다. 부대보다 네 곁이 좋아. 탈영으로 몰려도 괜찮아, 기다려. 그녀는 누구인가. 왜 나를 그리워하는가. 언제인가 한 번이라도 봤다면 기억이 날 텐데,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본 것도 같아. 어디에서 봤을까. 아니야, 절대로 본 적이 없다. 목숨을 걸고 찾아가는 그녀가 낯설다니. 만난 것 같기에, 만날 수 있기에 낯설다는 게 더 잘 어우러진다. 나는 맥을 놓지 않고 끝까지 뛰었다. 주말에 포상으로 주어진 외박을 반납하고 내무반에서 책을 읽었다.

지금도 그녀가 생각난다. 누굴까. 친한데 떠오르지 않는 얼굴. 산길 저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데 눈에 닿지 않는 그녀. 낯선 그녀가 다가선다. 비 내음과 어울린다. 나도 향기로 그녀에게 다가가련다. 정훈희의 ´꽃밭에서´를 흥얼거린다. 머지않아 매화 향이 물큰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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