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이 붉게  물든 하늘 새들이 저녁 잠자리를 찾기 위해 서둘러 날아가고 바르비종 부근의 샤일리 평야, 빈 볏짚이 놓여 있는 넓은 들판과 기도하는 농부의 옷까지도 물들이고 있다.

들판 저 멀리 교회첨탑에서는 삼종기도 중 저녁 무렵 하루 노동을 마치는 만종 종소리가 들려 올 때면 분주하게 움직이던 감자캐기를 멈추고 경건하게 하루의 감사기도를 드리는 가난한 농부의 기도 장면을 그린 밀레의 "만종"이 햇살이 투명하게 나뭇잎을 거치고  땅에 떨어지던 시월 어느날 오후, 문득 나에게로 다가왔다.  

한 때는 밀레 만종이 이발소 그림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닐  만큼 흔히 볼 수 있었지만, 나에게는 이상하게도 쉽게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았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도 모르게 자꾸만 만종이 내 마음을 끌어 댕겼다. 보통사람의 눈으로 만종을 대하고 있노라니, 숭고하고 한 차원 높은 노동의  신성함과 아름다움,  신께 드리는 감사기도 그리고 인간의 한계와  간절함이 내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던 것. 아마도  만종을 그렸던 밀레의 마음과 요즘 생각이 많아지는 내 마음의 주파수와 일치해서 그러지 않았나 싶다. 

밀레가 머물렀던 바르비종은 파리의 남동쪽 65km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이었으나 19세기 중반, 전염병인 콜레라를 피해 파리를  떠나 이곳으로 온 화가 루소와 밀레 등 80명 이상의 화가들이 살았다. 당시 유럽은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빈부 간에 격차가 심해졌고 농촌의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갔으며 파리를 중심으로 화려한 도시 문화가 발달해 갈수록 사람들은 자연과 농촌에 대한 노스탤지어의 향수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바르비종에서 밀레는 그림만으로 먹고 살기 힘들어 오전에 농사일을 하고 오후에 그림을 그렸다고 하지만 9명의 자녀를  둔 밀레는 생활고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밀레의 작품 만종은 결국 나를 다시 고향으로 데려갔다.

여름에는  엄마를 따라 고구마 줄기를 한 소쿠리 따와서 보라색으로 손가락을 물들이면서 고구마 줄기를 벗겼고, 햇고구마로 간식을 빨리 먹이고 싶은 엄만 아직 덜 큰 예쁜 보라색 작은 고구마를 캐서 가마솥 밥 위에 올려서 쪄 주시곤 하셨다. 밥알을 떼면서 먹는 고구마는 정말 달콤하고 맛있었지만, 본격적인 고구마 캐기는 참으로 고된 노동이었다. 당시 아직 어렸던 나는 밭 주위에서 들국화를 따면서 놀았지만, 엄청난 무게의 고구마 자루를 옮기고 나르는 부모님의 고단함은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작년 10월, 고향 친구가 부모님이 계신 시골로 고구마를 캐러 간다는 얘기가 갑자기 생각나 "올 가을에도 고구마 캐러 시골에 내려가냐?" 고 물었더니 아버지께서 많이 편찮으셔서 올해는 고구마 농사를 짓지 않았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해마다 연로해 가시는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밀레의 만종을 오마주했을  때 감자 대신 고구마를 오브제로 넣어 그려봤지만 전체적인 느낌과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아 감자를 그대로 넣어 그렸다. 
 

밀레가 만종을 그리게 된 것은 어렸을 때 할머니와 밭에서 일할 때 저녁 종 울리는 소리가 들리면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하던 모습을 생각하며 그렸다고 한다. 해 그림자가 점점 짧아지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 농부의 손길도 분주해질 시간인데, 나도 사색의 창을 닫고 잠시 마음속으로 이 땅의 모든 농부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림을 마무리한다.  

홍봉기 기자  lovein298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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