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눈부시게 피었다가 잠깐의 비바람에 흔적도 없이 떠나가고, 목련이 아름다운 자태를 도도하게 뽐내더니 어느새 모두 지고 숲은 또다시 짙은 녹음으로 가득해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아버지께서 초기치매가 오기 시작할 무렵 동생이랑 남해 독일 마을로 여행을 간 게 아마 이맘때쯤이었던 거 같네요.  

아버지랑 산책도 하고 사진도 찍고 할 계획으로 갔지만 아버진 기력이 쇠하시고 평생의 고된  노동으로 허리가 많이 휘어져 걷기가 쉽지 않으셨지요. 아버지께서 떠나신 지가 벌써 반년이 지났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나이 50이 넘은 딸을 보고 항상 우리를 "아가"라 부르셨던 아버지. "아가 왔냐~"  하면서 다정한 미소로 반기시던 아버지, 아가하고 부르시던 그 목소리를 더 들을 수 없다는 것이 큰 슬픔중의 하나로 다가옵니다. 

아버지!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고 살아보니 사는 게 만만치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요즘입니다. 어려운 일을 한고비 넘었다 싶으면 또 한 고비가 다가오고~ 그래서인지 몰라도 힘들 땐 아버지 생각이 더 많이 납디다. 자식 낳고  살면서 아버지께서 힘이 좋아 그렇게 고된 일을 하신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지요.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가 힘이 장사라는 소리를 자주 했는데 그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답니다. 항상 우리 집 일이 끝나면 일손이 부족한 마을 사람들 일도 적극적으로 도우셨던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께 부탁하러 오신 분들이 꽤 있었지요. 특히 섬이라 농사짓는 밭 대부분이 비탈진 곳에 있어서 보리를 수확할 때면 아버지는 그 무거운 탈곡기를 등에 지고 돌계단을 오르내리곤 하셨지요.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요, 이웃집 동창생 재근이네 집을 한참 지나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야 하셨지요.

그리고 힘들 때면 해질녘엔 막걸리 몇 잔으로 고된 몸을 달래시던 아버지... 어디 그 뿐이었겠습니까? 바다일은 또 얼마나 고된 일이었을까요. 겨울 엄동설한에는 김(해태) 발을 치기 위해 흔들리는 배 위에서 통소나무 기둥을 바다 밑 바위틈으로 고정시켜야 하는 그 고된 작업을 전 굴을 채취하다가 똑똑히 보았답니다. 돌아오는 배위에서 내가 깐 생굴로 요기를 하시던 아버지. 이렇게 많은 일을 하시다가 시간이 조금이라도 나면 먹을 갈고 붓을 손에 들고 글씨 연습을 하셨던 아버지, 저는 그런 아버지 모습을 보고 자랐지요.

백씨 문중에 쓸 글은 물론 동네 상여 나갈 때는 만장대 깃발에 한자를 쓰셨고 , 10년 넘게 어촌계장으로 마을 주민들을 위해 일하셨던 나의 아버지. 우리집 앞 방파제에 새마을 깃발과 금도 어촌계 깃발을 꽂고 마을 주민들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목청껏 외치시던 모습들은 지금도 어제 일처럼 환하답니다.

하얀 바지저고리 곱게 차려입고 다니셨던 한량이신 할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일을 시키려고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고 하는데, 배울 탐이 많으셨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얼마나 야속하고 미웠을까요? 어쩌면 그래서 아버지는 그런 한을 달래기 위해 그렇게 스스로 독학을 하셨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아버지 글쓰기는 치매가 진행되기 전까지도 계속 이어졌지요. 그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을 모두 대처에 내 보내대학교를 시키시느라 당신은 몸이 부셔져라 그렇게 일만 하셨지요.  그런 아버지를 생각하며 다시 감사를 드립니다.

비록 자식들에게 살갑게 표현은 하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모두 그런 아버지 사랑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답니다. 어느 깊은 겨울밤, 소변이 마련이 잠에서 깨면 고된 일로 코를 심하게 고시며 주무시다가도 "아부지 아부지" 하면 벌떡 일어나셔서 새벽 찬 마당에서 기다려 주셨던 나의 아버지...이럴 줄 알았으면 아버지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 텐데 하는 아쉬움만 제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고 있네요.

아버지  요즘 날이 따뜻해진 것을 보니 올해는 여름이 더 빨리 올 거 같아요. 여름이 되면 집집마다 망둥어(문저리)회 치는 소리가 들렸던 기억도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아버지와 같이 문저리 회무침을 맛있게 먹던 그 저녁 시간들을 저도 많이 사랑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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