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석양이 물들어가는 가을 저녁, 문화원에서 ‘문화가 있는 날’ 행사에 참석했다가 400살 된 은행나무와 마주했다. 순간 가슴이 쿵쾅거리는 감동을 느끼며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지는 가을 햇살에 살랑이는 은행잎이 손을 흔들며 반겨주었지만 마치 ‘왜 이제야 찾아왔느냐’는 듯 늦가을 바람 속에 아쉬움이 묻어 왔다.  

그날 이후 며칠이 지나도록 그 여운이 잊혀지지 않았다. 40년 공직생활을 마치고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호적계 박양’으로 시작한 공무원 시절, 일이 서툴러서, 사람들 대하는 일이 힘들어서, 윗사람에게 혼나서 몰래 책상 밑에 숨어서 울었던 그 시절을 잊지 못한다. 

50년전이던 1970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스무 살에 여성공무원 공채 1호로 임용되어 읍사무소에서 호적서기 업무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지금 문화원 은행나무 옆이 읍사무소 민원실이 있던 자리였다.

복사기도 없던 시절, 호적등본을 일일이 손으로 써서 민원인에게 발행해주었다. 손으로 써서 해야 하는 일이어서 업무에 속도는 날 수 없었고 밀려드는 민원 때문에 정말로 힘이 들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창문을 내다보면 키큰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가을날 샛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는 힘들고 지친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었었다.
지금 생각하니 스무살 어린 ‘박양’을 위로하고 지켜 준 건 바로 그 은행나무가 아니었을까?.

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나는 힘든 시절 나를 위로해 준 은행나무에 대한 고마움을 한편의 시로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늦가을 문화원에서 열린 문화의 날 행사에서 마주한 은행나무의 여운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시간의 나를 회상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을 담아 완성한 시 ‘해후’는 그렇게 씌어졌다. 
2020년 광양문인들의 글을 엮은 ‘광양문학’이 나왔고 그 책을 통해 나의 시를 읽은 많은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네”
“문화원 은행나무에 그런 사연이 있었네”
“호적계 박양이 이제 칠순이 넘었네”... 등등
한편의 시가 나는 물론 사람들의 마음에 추억의 불씨를 지펴준 것 같아 흐뭇했다.
부족한 시 지만 광양경제신문 독자들과 함께 50여년전의 읍사무소를 생각하며 부끄럽지만 시를 신문에 실어보기로 한다.

‘해후’
‘묵묵히 반백년을 기다린 나무/가랑잎 되어 떠돌던 무수한 나날/이제 겨우 멈춰 진 애틋한 눈길/ 무딘 가슴 속 불씨지피네/쏴아 바람에 실려 온 아련한 추억/먹먹해지는 가슴속 시린 회오리/반겨주는 은행나무 포근한 품속/흘러간 세월 강물 되어 흐르네/그 엣날 읍사무소 민원실 창가/기웃기웃 출근길 기다리다가/읍내사람 인생역사 손가락 아프게/쓰고 쓰던 단발머리 풋내기 박양/ 토닥토닥 위로하며 달래 준 버팀목/어느 날 훌훌히 떠났는데도/따뜻이 맞아주는 사백 살 은행나무/이제는 문화원 뜨락 보호수 됐네/사백 살이 오백 살이 되는 그날/더 뜨거운 백년해후 기약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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