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에 ‘미인도 위작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던 천경자 화가는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화가’로 널리 평가받고 있다. 광기를 타고 나지 않은 예술가는 보편적인 삶에 머물고 말지만 광기를 품고 태어난 화가는 화풍을 바꾸고 세상을 뒤흔들게 마련이다.  

어려서부터 화가의 열병을 앓은 것도 예술가적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버지가 화가의 길을 반대하자 미친 시늉까지 하면서 결국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림은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서만은 절대적 종교였던 셈이다. 그런 만큼 화가의 삶 또한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42년에 그린 “조부“와 1943년에 그린 ”조모“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이어 입선한 그녀는 1952년 부산에서 연 개인전에서 "생태" 작품을 발표, 화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60~1980년대 한국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한 그녀는 보기 드물게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화가이기도 했다. 그녀 작품에는 그녀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화풍이 있는데 바로 고독과 몽환적인 분위기가 그렇다. 그녀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느낌을 받게 되는 이유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이라는 작품은 화가가 54세 때 22세를 회상하며 그린 일종의 자화상이다. 그녀 작품에는 항상 뱀과 꽃이 등장하는데, 이는 그녀만의 독특한 트레이드마크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런 고백을 했다. “뱀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20대 후반 고통스럽던 시절이었다. 나는 뱀을 그림으로써 어떤 껍질을 깰 수 있었다” 뱀은 거듭남의 상징이기도 하다. 허물을 벗기 때문이다. 화가는 자신의 그림이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스스로 경계했던 것이다.

22세를 회상하며 그린 그녀의 자화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슴에는 여러 송이 꽃이 피었고, 입술은 마치 발설하면 큰일이라도 날듯 앙다물고 있다. 그리고 커다란 눈은 어딘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어쩌면 그녀는 억압받고 사는 여성들의 아픔과 자신의 내면에서 들끓는 예술가적인 광기를 그런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어 했는지 모를 일이다.

홍봉기 기자  lovein298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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