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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곧 나의 유언이다”광양경제신문 독자위원장  나 종년
  • 광양경제신문
  • 승인 2019.06.2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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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어지러울수록 훌륭한 지도자를 생각하게 하고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이 되새겨 진다.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위인들의 발자취를 조명해 보면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말과 행동이 일관되게 일치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광양망덕포구에 친필원고가 보관되어서 우리에게 친숙한 민족시인 윤동주가 국민들의 가슴속에 더욱 빛나는 샛별처럼 간직되어 있는 것은 그의 짧은 생애가 아쉽기도 하지만 그의 글과 그의 정신과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살았기 때문 일 것 이다.

그는 당시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 보다 풍족한 생활 속에서 공부를 하고 시를 쓰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나라를 잃어버린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번민하면서 조국을 되찾기 위해 ‘재 교토 조선인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후쿠오카형무소’에서 광복을 불과 6개월 남겨둔 1945년 2월 16일 새벽별이 빛나는 3시 36분 일본의 포악한 생체실험으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순국하였다. 

윤동주는 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무 걱정 없이 살아도 되는 환경에서 그토록 고민하고 괴로워했을까? 윤동주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연약하고 나약한 청년이 아니라 축구를 잘하고 은진중학교 교내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할 정도의 뛰어난 리더십을 가진 멋진 청년 이였다. 일본 유학시절 송몽규와 함께 교토 유학생을 중심으로 실력으로 일본을 극복 하려고한 혁명을 꿈꾸던 대한민국의 기백 있는 남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정신과 행동은 그의 외삼촌이자 당시 북간도의 대통령이라 불렸던 규암 김약연지사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이다.

김약연지사는 1868년 함경북도 회령출신으로 1942년 광복을 3년 앞두고 순국하신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은 애국지사이시다. 그는 1899년 일행 142명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만주 간도지방으로 이주 하였다.

조국의 국권이 서서히 일제로 넘어가는 시기에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는 길이 나라를 되찾는 길이라고 굳게 믿은 선생은 ‘동쪽의 조국을 밝힌다’라는 明東村을 만들고 가장 먼저 학전(學田)을 조성하고 손수 농토를 개간하며 농사를 지어 명동서숙, 명동중학교, 명동여학교를 설립 하였다. 그리고 1919년 2월 25일 간도 한인 대표로 러시아 니콜리스크(nicolsk)에서 열린 전 러시아 한족중앙총회(대한민국국민의회)에 참석 하였다.

1919년 3월, 간도 용정 만세 사건을 주도하다 연길 감옥에 3년간 구금 당하였다. 1937년 용정으로 이주한 뒤 은진중학교 이사장을 맡으면서 꾸준히 인재교육에 일생을 바치셨다. 그가 배출한 지도자는 문익환, 장준하, 송몽규, 윤동주, 강원룡, 나운규, 정일권 등 12,000명이 되었고 안중근의사가 선생의 배려로 사격연습을 하였고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 수 있도록 후원 하였으니 그의 일생이 바로 한국의 독립운동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는 만주와 서울, 러시아 등지의 독립단체를 연합하기 위해 노력해 마침내 1919년 9월 11일 ‘통합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가 출범 하는데 크게 기여 하였다. 그가 활동했던 용정의 일송정과 혜란강, 용문교, 용두레우물, 용주사는 ’선구자‘의 노래가사가 되어 우리들의 가슴속에 지금도 함께 하고 있다. 

규암 김약연선생은 순국하시기 직전 가족들이 유언을 묻자 “나의 삶이 곧 나의 유언 이다”라는 위대한 말씀을 남기셨다. 나라가 혼란스러울수록 언행이 일치되고 국민을 하나로 통합시킬 큰 지도자를 지금 이 시대는 간절히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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