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빈 에세이스트

어릴 때 가끔 어머니 뒤를 따라 장독대에 갔다. 장독대는 뒤꼍 대나무 숲 아래 있었다. 어머니가 독을 열어 보실 때 독에 담긴 갖가지 발효식품들을 구경하는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독 안에 가득 들어 있는 고추장, 된장 그리고 조선간장 등 코를 찌르는 낯선 향기들이었지만 어린 나의 몸에 편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그러나 커다란 독은 키가 작은 꼬마가 접근하기에는 만만치가 않았다. 올려다 보이는 독의 안을 들여다보는 게 두려웠다. '저 장독 안에 혹시 어떤 괴물이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나만의 상상이 두려움을 점점 더 키운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장독 뚜껑을 들어 올리실 때는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어야 했고 장독 뚜껑을 다른 곳에 옮겨놓고 어머니가 독 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고 난 후에야 장독의 테두리를 붙잡고 까치발을 하고 슬며시 독안을 엿보아야 했다. 막상 고개를 구부리고 장독에 가까이 가서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 허망한 기분이라니! 내가 상상 속에서 떠올렸던 흉측한 괴물은 고사하고 오히려 어떤 평온함이 느껴지는 게 아닌가. 지금 생각하면 그게 '발효‘라는 과학의 비밀 덕분이 아닐까 싶다. 자신이 지닌 맛과 향기를 몇 달 아니 몇 년 동안 삭이고 삭혀 더 깊은 맛과 향을 내는 희생 말이다. 어머니가 사기그릇에 떠낸 투명에 가까운 까만 조선장, 값비싼 보석가루라도 흩뿌려 놓은 듯 자잘하게 부서진 햇빛에 반짝거리는 조선장의 해맑은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어린 나에게 보였던 그 조선장의 표정은 눈이 부셔 눈을 가리는 어떤 부끄러운 기쁨 같은 거였다. 마치 동굴 속에서 오랜 세월 수행한 자가 깊은 깨달음을 얻어 나오며 처음 햇빛을 대하는 맑은 얼굴 같은 것이었다. 내가 이처럼 어머니를 따라서 장독대를 찾았던 이유는 이것 말고 또 다른 것이 있다. 장독대에는 텅 비어 있는 독이 몇 개 있었다. 그 중에 가장 큰 독의 뚜껑을 조심스레 열고 고개를 집어넣은 다음 그 텅 빈 공간을 향해 목청을 높이거나 낮추거나 하며 요모조모로 소리를 내보는 것 때문이다. 그때 독안에서 공명되어 울리는 소리는 무섭기 보다는 신비로움을 선사했다.
그 소리의 질감은 목소리 크기와 독 안에 넣는 정도의 따라 각양각색으로 변화하여 내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어머니가 집에 계시지 않을 때나 또 심심하거나 괜히 쓸쓸함이 느껴질 때 나는 대나무 숲이 있는 뒤꼍 장독대를 찾아가서 그 신비감을 혼자서 즐기곤 했다. 장독대 덕분일까? 나는 지금도 '발효'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존재의 껍질과 속까지 다 내려놓은 다음에야 얻을 수 있는 색다른 맛인 '발효.'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마음속에 이런 신비한 장독대가 하나씩은 있어야 할 것이다.
금세 쏟아지는 감정을 아무 것도 거르지 않고 내 뱉는 경박한 말과 글, 섣부른 행동이 아니라 오랜 세월 아니, 잠깐의 시간이라도 삭히고 발효하여 조금은 깊고 향긋한 장맛 같은 말과 글이며 행등을 보여주기 위해선 분명, 신비한 장독이 필요할 것이다.

데스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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