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상 준 소설가/광양고 교장
우리학교의 숲 ‘어울 林’에 있는 활엽수들도 부랴사랴 이파리를 떨궈내고 있습니다. 유난히 비 많고 더웠던 올 여름 탓에 가을이 더 조급스레 닿습니다. 형! 잘 지내시지요. 저번 모임에 참석할 수 없어서 뵙지 못했습니다. 부지런하지 못하여 늘 엄벙부렁하다 보니, 두어 달에 한 번 만나는 데도 얼굴 내밀기가 참 쉽지 않네요. 형 뵙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제겐 생활의 동력이 되곤 하는 데도 말입니다. 학교 울타리 안에서 교사직 수행하는 사람들이 학교 바깥의 사회적 풍광에 대해 눈과 입 닫고 사는 분들도 적지 않은데, 형은 학교에 계시면서도 대사회적 발언을 줄곧 해 오셨지요. 특히 교직을 그만두고 난 이후 형의 행보는 더욱 거침없어, 아직 현직에 있는 저로선 부끄럽고 아쉬울 따름입니다. 근래, 특별히 저의 가슴을 매섭게 친 건, 한진중공업 해고사태의 해결을 요구하며 크레인에서 밤 지새고 있는 ‘김진숙’을 만나러 제 2차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에 다녀온 뒤, 심경을 토로한 형의 글이었습니다. ‘나는 왜 이번 희망버스를 탔는가? 이유는 단순하다...(중략)...한 여인이 185일 동안 35m 상공에서 농성한다는 것은, 과연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도저히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하고 있다. 사실, 나 하나 참가해서 전체 행사에 큰 도움이 된 것은 아니다. 정리해고 문제 해결된다는 보장도 없다...(중략)...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마음이 편치 못했기 때문이다. 오직 그것이 이유다.’ 미약하와(?) 힘도 보탤 수 없지만 그곳에 가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못’할 것 같아서 다녀왔다는 형의 심중이 저를 참으로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부자인 자가 재력으로,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으로, 수도자가 교리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s) 한다면 평범한 시민은 민주주의를 옭죄는, 폄훼하는 여타의 행위에 거부의 동참의식으로 또한 오블리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의 글 읽으며, 제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도덕적 의무감은 어떠해야 하는 지 새삼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얼 배우고 익혀, 아름다운 자아를 실현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전인적 품성을 지닌 인격체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이 견인해내지 못하면 학교의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할 수 없을진저, 교사로서 어떤 모습으로 오블리주 해야 하는지? 오래된 명제이면서도 언제나 현재진행형인 과제를 곰곰 떠올리게 됩니다. 형! 제가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건, 아이들에 대한 관심만은 여직 무솔진 않았다는 점입니다. 교직 얼마 남지 않은 제가 할 수 있는 직분으로서의 오블리주란, 따뜻하고 너그러운 눈빛으로 아이들 바라보는 걸 군눈팔며 놓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이렇게 말 하고 보니, 저의 평범함이 드러나 민망하기도 하고 조금은 속상하기도 합니다. 좀 더 멋지게 혹은 더 거창하게 복무의지를 표현할 수 없나, 하면서 말입니다. 어쩌겠습니까! 제가 지금껏 파 온 깊이가 그만큼인 걸요. 형! 이 가을에 우리학교 한 번 방문해 주시길 간곡히 바랍니다. 고 3 아이들 수능 끝나면, 방치 수준에 놓이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예비대학생을 위한 초청 강의’를 수능 이후 지속해 왔는데, 얼마 전까지 교단에 섰던 형이 이제 바깥에서 들여다 본 학교 안의 풍경을 어떻게 진단하고 계시는지 후배교사들에게도 들려주시고,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에게 맞는 세상 이야기 해주시길 앙망하옵니다. 그 부탁의 갈음으로 제가 밥 사고, 술 사겠습니다.
형! 볕 좋은 가을 어느 날, 단풍 구경 한 번 갑시다. 어깨 위에 얹힌 삶의 무게가 버거울지라도, 그날만큼은 죄 내려놓고 낙엽도 밟고 단풍 바라보며 술 잔 거나히 나누고 싶습니다.
건강과 평화를 빕니다.

데스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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