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지 선 시인

봄이 실종된 지 오래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봄꽃이 만발한가 싶더니 또 이렇게 한여름이 되고 말았다. 계절이 이처럼 빠르게 변하다 보니 미처 바꾸지 못한 옷과 신발들이 제자리를 잡지 못해 여기저기 천덕꾸러기가 된 채 굴러다니고 있다. 내심은 소유물을 줄어야지 하고 생각은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래서 먼저 신발장부터 정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세상에, 눈길 몇 번 주지 않은 신발들은 물론, 장소에 따라 제각기 자기 역할을 담당하던 신발들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신발도 제 주인의 체형을 닮는지 하나같이 한쪽 귀퉁이가 닳아져 있다는 점이다. 엊그제 새로 사온 가죽구두는 반들반들한 윤기를 내며 뽐내고 있지만, 그 신발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윤기를 잃고 한쪽으로 닳아지게 될 것이다. 하긴 이 세상에 닳아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은 하나도 없을 테지. 우리는 모두 조금씩 그렇게 마음을 닳으며 살다가 가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신발들을 정리하려고 하니 버리기에는 또 아까운 것들이 마음을 붙잡는다. 그래서 몇 번이이고 만지작거리다가 가장 많이 낡은 것들만 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뒤축을 고쳐서 쓸 만한 것들은 또 따로 모아 두었다. 그래도 그렇게 닳아진 신발들이 나를 끌고 다닌 삶의 이력이고 보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물론 나는 올바르게 걷는다고 걸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람 사는 일도 늘 그럴 것이다. 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고 다짐 하지만, 그런 결심은 오래가지 못한다. 아니, 상대방의 기울어진 모습은 눈에 쉽게 들어오는 데 내가 기울어진 모습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간혹 누군가 충고를 해주지만 그 조차 받아드리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안타깝지만 이게 우리의 한계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은 마음이 하늘보다 넓다가도 또 빈정을 상하게 되면 바늘 하나도 꽂을 수 없을 만큼 좁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수선공에게 맡긴 신발들이 다시 원래 신발의 모습으로 복원 되듯이 서로가 서로에게 수선공이 된다면 우리는 훨씬 반듯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따뜻한 수선공이 될 필요가 있다. 마음이 닳아지고 피폐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 밀 때 내가 선 자리는 그만큼 바르게 될 것이다. 요즘 살기가 너무 힘들다고 아우성들이다. 하지만 물질적인 가치에만 눈길을 주지 말고 소외된 이웃에게 눈길을 돌리게 되면 내 탄식이 얼마나 사치인가 하는 점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세상은 어차피 문제투성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아니,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제대로 된 만족감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구두수선공’이라는 제목의 시가 가슴을 맴돈다. ‘그는 구두 밑창에 겹겹이 달라붙은 길들을 더듬는다/ 뒤엉킨 길들을 풀어놓으려는 그의 손마디가 저릿하다 /시한폭탄을 해체할 때처럼 진땀나는 순간, /자칫 잘못 건드리면 길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서거나/ 뜀박질이 그의 심장을 짓밟고 지나갈 것이다 /구두란 길과 걸음의 교차점,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는 걸음과 길에서/ 절충점을 모색하기 전에 그는 먼저 숨을 고른다(중략) /고공행진을 거듭하는 세상에서/ 굽의 높이를 조정하는 일 또한 만만치 않다 /못이 박힌 손으로 나달나달 떨어진 날들을 깁는 그는/ 차츰 지워지고 실밥이 그를 대신하여 툭툭 삐져나온다’(최일걸 詩 중에)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일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수선공이 되는 것이 아닐까,를 생각하며 신발장 문을 닫고 외출 준비를 서두른다. 오늘도 어디에선가 마음을 닳고 살아가는 그대가 눈에 밟힌다.

데스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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