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금융위기는 세계의 모든 경제를 뒤흔들 뿐만 아니라 시장 구조까지 빠르게 재편시키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산업기반이 취약한 나라로써는 보통 견디기 힘든 일이 아니다. 그 중에서 수출 의존도가 높은 산업은 더 힘든 상황으로 내 몰리고 있다.

그러나 위기는 또 하나의 기회가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틈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 산업이 그렇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미국의 3대 자동차 회사의 신용을 무력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이를 잘만 활용한다면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또 한 번의 좋은 기회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생산라인과 제품으로는 승부를 걸 수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한 마디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전제 하에 품질은 물론 가격까지 경쟁력을 가질 수 있어야만 승부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한국 자동차가 걸어온 길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는 고종황제가 타고 다녔던 포드 자동차였다. 사람들은 그 차를 가리켜 발없는 마차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임금이 타고 다닌 차라는 뜻으로 어차(御車)로 불리기도 했다. 그 때가 1903년이니 지금으로부터 1세기가 넘은 이야기다. 하지만 자동차가 서울에 등장한 시기는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 1890년대 후반 서양문물과 함께 들어온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자동차보다 먼저 1899년 우리나라 최초의 전차가 서대문과 청량리를 다녔고 또 인천 제물포와 노량진 간 33km의 철도가 개통돼 자동차보다 철도에 의한 교통혁명이 먼저 일어났다. 자동차는 이후 황실용 2대와 총독부에 1대가 도입돼 1911년에는 우리나라 보유대수는 3대가 됐다. 이후 부유층의 자가용과 운수사업용으로 들여오기 시작하고 판매와 서비스회사까지 생겨나 1945년에는 약 7,000대로 보유대수가 늘어나면서 광복을 맞았다.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나라 자동차는 세계 어디에 내어 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뿐만 아니라, 1980년대는 조선과 함께 우리나라 수출을 이끄는 쌍두마차로 역할을 톡톡히 담당했다. 이제 자동차는 첨단산업과 전자산업의 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자동차가 탄생한 지도 벌써 50년이 넘었다. 국제차량공업의 최무성 삼형제가 1955년 미군한테 물려받은 지프의 엔진과 변속기 등을 이용해 손으로 철판을 펴서 만든 최초의 국산차가 바로 ‘시발(始發) 자동차’다.

이러한 출발을 기점으로 1975년에는 현대자동차의 ‘포니’가 생산됨으로 처음으로 우리 브랜드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1976년 포니 6대를 에콰도르에 첫 수출한 뒤 지금까지 해외시장에 수출한 국산차는 2,500만대가 넘는다. 그리고 현대자동차는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했고, 50년이란 짧은 역사 속에서도 국내 자동차산업은 미국·일본·독일·중국·프랑스에 이어 세계 6위의 자동차 생산 대국으로 떠올랐다.

위기는 또 하나의 기회
미국의 금융위기로 인해 세계 자동차산업의 시장이 지각변동을 겪으며 급속하게 나빠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 시장은 판매량이 30% 이상 감소했다. 그동안 세계 자동차산업을 이끌어 온 미국의 3대 자동차 회사도 내수부진을 겪으면서 불황의 여파를 심하게 겪고 있다. 또한 영국의 자동차 시장은 50%, 스페인은 45% 정도가 격감하는 등, 심각한 후유증을 보이고 있다. 이런 세계시장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자동차산업도 크게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몰락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자동차 회사들은 틈새시장을 노리기 위한 옥석가리기에 돌입을 하고 있다. 생사를 건 변화를 하지 않으면 스스로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을 가지고 다시 한 번 불황의 파고를 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특히 이번 위기의 두드러진 특징은 중소형 보다 대형차가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는 중소형차에 박차를 가할 전망이다. 현대자동차의 전체 차종 중 중소형차 비중은 48.9%로, 도요타의 38.5% 등 선진기업에 비해 훨씬 높은 편이라 다소 유리한 위치를 고수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고유가 때문에 세계 신흥시장과 선진시장은 중소형차 수요가 더욱 늘어나고 있다. 일본의 자동차 산업이 미국을 추월하게 된 것도 1970년 오일파동으로 인한 중소형 차의 선호 때문이었다. 요즘 치솟고 있는 원·달러와 환율 급등은 오히려 취약한 한국 차의 원가경쟁력 회복에는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중소형차로 승부를
1997년에 불어 닥친 외환위기가 오히려 오늘날 한국 자동차산업이 세계 5위로 도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 결과 고비용 구조에 시달리던 한국 자동차산업의 가격경쟁력이 좋아지는 구실을 하게 됐다. 지금도 자동차의 국산화율이 90%가 넘는 점에서 달러 가뭄에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 경제에 큰 희망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자동차 수출은 지난해 430억에 달하는 달러 흑자를 냈고, 올해는 더 많은 흑자를 기록하리라는 예상을 하고 있다. 특히 고려해야 할 문제는 친환경적인 차량개발에 있다. 현재 미국 3대 자동차 회사의 신용도는 급격히 추락하고 있으며 디트로이트도 거의 고사 직전에 치닫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런 회사들이 차지하던 시장이 중소형차로 이동하고 있지만 미국의 대표 자동차 회사들은 더 이상 투자할 여력이 부족한 상태다.

현재로써는 중소형차에 관한한 경쟁력이 없는 형편이다. 이러한 시장현실은 한국 자동차 산업에 좋은 기회로 작용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물론, 단기적인 시장침체로 어려움을 겪겠지만 한국의 자동차산업에는 오히려 기회가 될 것이다. 소형차 시장은 이번 금융위기로 크게 흔들리는 미국과 유럽이 아닌 피라미드의 밑 부분에 속하는 신흥국가가 주도할 것이다. 게다가 한국 기업은 이미 미국과 유럽 이외에도 포스트 브릭스 시장을 이 확보해 둔 상태다. 동유럽 17.8%, 중동 13.5%, 중남미 11.6%로 비중을 대폭 높여놨고 아프리카, 태평양 지역의 소형차 시장에서는 그 어떤 나라보다 강한 판매를 보이고 있다.

미래형 자동차 개발에 전력을
이제 한국 자동차산업은 중·소형차 경쟁력을 등에 업고 2010년 세계 4위를 넘보고 있다. 한국 자동차산업의 제2기 성장신화를 연다는 것인데, 2010년 국내외 생산능력 650만대, 수출 250만대로 미국·일본·독일에 이어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4강국으로 부상한다는 목표다. 또 2012년에는 국내 완성차업체 중 한곳이 전 세계 100대 브랜드에 진입한다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지금은 세계 자동차업체 7개사가 100대 브랜드에 포함돼 있고, 국내 업체는 유일하게 삼성전자만 들어가 있다.

그러나 세계 4강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최고 수준의 기술 개발과 브랜드 파워 육성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특히 시장이 급속히 변동하면서 승용차와 SUV·버스·트럭 등 모든 차종을, 또 경차에서부터 최고급 럭셔리까지 풀 라인업을 구축해 전 세계에 판매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초대형 글로벌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그러나 선진국 자동차업계를 추격해온 단계를 넘어 어느 한 분야에서라도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미래형 자동차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앞으로는 친환경 미래형 차를 누가 얼마나 빨리 갖추느냐가 전 세계 자동차업체들의 생존을 판가름하게 될 것이다. 양적인 생산 대수를 넘어 질적인 도약이 관건이고, 무엇보다 친환경 자동차(하이브리드차·수소연료 전지차 등) 기술 개발 여부가 국산 브랜드의 세계 4위 부상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국내 자동차산업에서 엔진은 거의 100%, 트랜스미션은 90∼95% 선진국 메이커 수준에 도달해 있다. 그러나 미래형 자동차 기술에서는 일본 업체 등에 비하면 30% 수준에 그치고 있다. 범용기술 경쟁력의 격차는 축소되고 있지만, 미래형 자동차와 첨단기술 경쟁력의 격차는 계속 확대되고 있다. 초기품질지수 1위에도 불구하고 내구성을 따지는 선진국 중고차 시장에서 국내 업체는 일본차에 비해 크게 밀리고 있고, 특허출원(미국) 건수로 첨단자동차 기술 경쟁력을 따져보면 일본 업체는 4곳이 100위권에 등재 됐지만, 한국은 한곳도 들지 못하고 있다. 사실 기존 차량만으로는 유럽 등 해외 시장을 공략하기 어렵다. 자동차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국제경쟁력이 환경·에너지·안전 분야의 신기술에 좌우되고 있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의 변화만이 살아남는 길
이제는 하이브리드차·연료전지차·지능형 자동차 개발이 자동차업체의 생존 조건이 됐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환경 규제가 강화되면서 전 세계 메이커들은 무공해 환경 차 기술을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휘발유·디젤 엔진과 전기모터를 함께 구동해 에너지를 절감하는 하이브리드카 개발 경쟁에서는 일본 업체들이 가장 앞서고 있는데, 세계 하이브리드차 시장의 대부분은 도요타와 혼다가 장악하고 있다. 자동차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면서 자동차 부품 역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할” 정도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국내 자동차에서 전자부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현재 25%인데, 미래형 자동차의 등장으로 갈수록 비중이 커질 전망이다. 특히 수소연료 자동차가 등장하면 내연기관(엔진)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센서로 작동되는 지능형 자동차가 등장하면 브레이크 장치도 필요 없어진다. 센서가 앞, 뒤, 옆 차량 사이의 간격을 체크해 자동 주행을 해주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국내 자동차산업이 기존 ‘기계’ 중심의 인력과 의사결정 구조에서 탈피해 전자 분야의 발언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빨리 전환해야 국제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또한 포드나 도요타 생산방식처럼 우리나라도 자동차 경쟁력을 체계화해 독자적인 생산 시스템을 구축해야만 글로벌 자동차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

도요타는 ‘환경’, 혼다는 ‘안전’, BMW는 ‘고급차’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데, 국산차도 특유의 비교우위를 창출해 고유 브랜드 이미지를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특히 요즘처럼 미국의 시장이 급격히 몰락하고 있는 때, 우리나라 자동차가 그 틈새를 빠르게 파고든다면 다시 한 번 제2의 자동차 강국으로 우뚝 서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홍봉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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