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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이강향림 수필가
  • 광양경제신문
  • 승인 2022.12.14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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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나는 핸드폰에 SNS 계정을 만들었다. 폴더 ‘liking’에는 내가 기르던 식물들이 자릴 잡았다. 그곳으로 들어갔다. 오래전 이별한 부용이의 맵시가 눈에 띄었다. 베란다 실외기 위에서 햇볕에 달궈진 채 붉은 자태를 뽐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사진으로 보니 기억이 생생했다. 풀 분에서 키워 분갈이를 두어 번 거친 부용이다. 초록 줄기가 자라 튼튼한 갈색 목질로 변한 것이다.

초록 잎에 솜털이 도드라졌던 연약한 부용은 해마다 솜벌레의 공격으로 몸살을 앓았다. 그 벌레를 잡아주던 나는 부용이가 볕을 쐬게 하려고 실외기 위에 올려놓았다. 추운 겨울에는 낮 동안 내놓았다가 해가 지면 들여놓기를 반복했다. 부용이에게 코를 대면 향기가 침샘을 자극했다.

부용이 말고도 내가 키운 다육들은 많았다. 성장 사진들이 날짜별로 보였다. 베란다 선반 윗칸에 놓인 성미인과 아메치스에 눈길이 갔다. 나는 아이 키우듯 보살핀 흔적들을 더듬었다.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사라진 아이들도 많았다. 뜨거운 여름에 녹아내리고, 곰팡이에 공격당해 줄기가 까맣게 타며 속이 비어가기도 했다.

식물들에는 햇볕만큼이나 바람이 중요하다. 무더운 여름에는 멀티탭을 연결해 선풍기를 베란다 양쪽으로 틀어줬다. 겨울날에는 살얼음으로 푸른 잎이며 알갱이가 투명하게 변해 떨어져 내리기도 여러 번이었다. 생각 끝에 나는 추운 겨울밤이면 다육이 위에 신문지를 덮어주었다. TV에 노숙자들이 신문지를 덮은 모습에 힌트를 얻었다. 영하로 떨어진 밤엔 종이 이불이지만 다육에게 따뜻한 온기를 안겨주었다.

인연이 그러하듯 나는 다육들을 다 지키지 못했다. 기억 속 여린 모습, 절정기의 풋풋함, 허리가 고꾸라져 화분에 걸터앉은 형상까지 뇌리에서 되살아났다. 죽어가던 몸체에 남겨진 잎 하나까지. 나는 그 이파리를 화분 흙 위에 며칠간 올려뒀다. 그러면 어느 순간 어린 분신이 고개를 내밀었다.

어린 분신이 흙 위에 뿌리를 걸치고 엄마 잎의 양분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엄마 잎이 쪼글거리고 말라갈수록 어린싹은 뿌리를 굳건히 박았다. 그럴 때 나는 어떤 감탄사도 필요치 않았다. 이파리 하나에서 움튼 생명에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 어린 분신은 엄마 잎이 떨어진 찰나에 놓아버리지 못하는 나의 욕망이 버무려진 결과물이려나. 둘은 형태만 다른 세포의 변화였다. 누군가 사라져도 누군가로 인해 메꿔지는 순환의 연속인 것을. 동물이든 식물이든 끝까지 함께 한다면 좋을까? 헤어지는 슬픔은 비껴가고 싶은 감정인데 알면서도 되풀이하는 건 누구 말대로 잔인한 짓이려나.

반복되는 기쁨과 슬픔을 다잡으며 폴더나 기억에 가두는 걸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걸까. 삶이라 우기는 억지일까. 내가 어미 잎을 버리면 그만이었다. 나에게는 버릴 여유가 없었다. 생활이라고 여긴 믿음이 이기적인 감정인가. 나는 삶과 죽음에 집착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동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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