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계산 동백림에 봄이 하마 어지렸다
가슴속 옛 기억이란 이리도 쓰라린건가
그대들 부디 와 눕고 앉고 거닐어보세
내 차마 못 보는 뜻을 그제사 짐작하리.
 - 이은상 ‘백계산 동백림’ -

꽃이 피려면 아직 멀었다.
아직 겨울이 한창인데 에둘러 백계산 동백림으로 꽃 마중을 나갔다.
바람이 대나무 숲과 동백나무 숲 사이를 흐르며 속삭였다. “너무 일찍 왔어요. 더 기다려야 해요...”
백계산의 만개한 동백을 보지 못한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또, 한 겨울 속, 아직 꽃 한송이 피어나지 않은 동백 숲을 홀로 걸으며 느끼는 ‘절대고독’을 오롯이 맛 본 사람도 드물 것이다.
낡아서 너덜해진 안내판에서 광양과 인연이 깊은 이은상 시인의 ‘백계산 동백림’을 찾아 읽은 후 인기척이라곤 하나 없는 호젓한 길을 걷기 시작한다.  
행복은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음미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휘영청 밝은 달 보다 아직 떠오르지 않은 달을 기다리는 것이 때로는 더 설레듯 만개한 동백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은 벅찬 일이다. 이 순간, 천년의 이 숲이 내 것이 된 것 마냥 그렇게 벅찰 뿐이다. 
꽃이 피지 않아도 숲은 황홀하다. 소망 샘에서 손바가지를 하고 여섯 개의 소망을 중얼거리며 여섯 번의 물을 받아 마시고 옥룡사지에 오르니 끝내주는 ‘뷰’가 펼쳐진다. 
동백 잎에 반사되는 햇빛이 마치 ‘윤슬’처럼 반짝거린다. 산속 동물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상수리열매가 한 무더기다.  
옥룡사지. 우리나라 불교와 민속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선각국사 도선이 35년간 머물다가 입적한 유서 깊은 곳. 8세기 초 통일신라 때 창건됐다고 전해지는 옥룡사가 1878년 화재로 불에 타서 지금은 터만 남아 있기에 옥룡사지라고 부른다. 
1997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에서 건물터와 비석조각을 찾아냈고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과 관이 발견됐다. 도선국사는 옥룡사 주변의 땅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동백나무 숲을 조성했고 훼손 없이 천년을 이어오고 있다. 
세상이 어수선하다. 떡 줄 사람은 말없이 침묵하는데 누구나, 아무나 다 ‘뭘 해보겠다’고 설레발을 친다. 마음이 어지럽다. 
살다보면 침잠의 시간, 침묵의 시간이 필요 할 때가 있다. 천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변함이 없는 이곳, 하지만 여전히 설렘을 주는 이곳에서 소망샘물 한 바가지 받아 마시고 ‘그 때’를 기다리자. 동백꽃이 피어나는 ‘그 때’를....   

김영신 기자  ge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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