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움을 따스함으로 빚으려면

136cm라니! 며칠 전 한라산에 그렇게나 많은 눈이 쌓였다. 한강과 낙동강도 견디지 못하고 꽁꽁 얼고 말았다. 홍천 영하 26.5도, 횡성 28.2도, 향로봉은 29.1도란다. 흩어져 사는 식구들이 익산, 청양, 서울, 파주에서 얼마나 추운지 서로 사진들을 보내왔다. 빙판길이 무서워 버스를 타려다 온몸이 꽁꽁 얼다 못해 아려서 다시 차를 끌고 가는 지인도 있었다.

나 역시도 광양살이 24년 만에, 아니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을 만났다.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수도 계량기가 동파되었단다. 남편이 철물점에 가서 새 계량기를 샀다. 꽁꽁 얼다 못해 깨져버리고 막혀버린 계량기와 수도관! 남편이 궁리 끝에 긴 전선을 연결해 머리 건조기를 끌고 나왔다. 열을 가해 얼음들이 녹나 싶더니, 갑자기 물이 쏟아져 나왔다.

복도 가득 쏟아진 물을 아들과 내가 비와 쓰레받기로 몰고, 퍼서 대야에 담기 시작했다. 정말 놀라운 건 그다음부터였다. 분명히 물을 쓸어모았는데 쓰레받기에 올라오는 건 눈덩이들이었다. 그리고 발밑은 빙판길이 되어 내 몸이 빙그르르 돌았다. 이런 환타지 동화 속 같은 일이 일어나다니! 지나가는 아파트 주민들이 우리를 흘긋거렸다. ‘공용 복도에 빙판길을 만들고 있으니, 당연히 짜증나겠지? 이대로 두고 갈까 걱정도 될 거야.’

미안했다. 화를 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마른걸레로 마지막 물기, 아니 얼음까지 닦아보려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단단히 얼어 시멘트 바닥과 얼싸안고 한 몸이 되어버린 빙판은 무엇으로도 닦을 수 없었다. 결국 이웃의 보행을 위해 빈 상자들을 납작하게 개서 복도 위에 줄줄이 뉘었다. 마스게임 하는 선수들처럼 얌전히 손잡고 누워있는 상자들이 우리 눈에는 썩 괜찮아보였다.

그때 한 남자가 다가왔다. 나는 긴장했다. “계량기가 얼었어요?” “예.” 그 남자는 한참을 바라보고는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빙판 길을 만들어 놓았다며 비난하러 온 게 아니었다. 따그락따그락. 마무리하고 일어서는데. 엘리베이터 길목 언저리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계량기 뚜껑을 여닫는 소리였다.

혼자 사는 아주머니가 업체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수도 계량기가 얼어 물이 안 나오니, 좀 고쳐달라는 것이었는데, 동파된 집이 많아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 모양이었다. 시무룩한 아주머니에게 남편이 자신이 도와주겠다며 다가갔다. 좀 있으니 옆집에서도 사람이 나왔다. 계량기가 얼어 물이 안 나온다는 것이었다. 계량기는 어느 철물점에서 살 수 있는지부터 알려주었다. 조금 있으니 우리가 알려준 대로 그 집도 머리 건조기를 들고 나왔다.

그다음 날에도 동파되는 집들이 생기면서 복도에는 이불까지 깔리고 말았다. 눈앞에서 건물 안의 무언가가 얼고, 물이 얼음이 되고, 눈이 되는 날씨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었다. 왜 깨끗하고 예쁜 길 대신 종이 상자를 밟고 다니게 했느냐고, 왜 빙판으로 만들었느냐고, 언제 치워놓을 거냐고 비난하지도, 투덜대지도, 일초만큼도 눈치를 주는 이가 없었다.

자신의 집에도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아는 능력자들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다시 이삼일이 지나 햇볕이 바짝 올랐다. 복도를 덮고 있던 마스게임 선수들과 이불들이 걷혔다. 청소하려고 엄마 집에 가 보았을 때에는 이미 복도가 아주 깨끗이 씻겨져 있었다. 아파트 청소해주시는 아주머니와 주민들 몇몇이 팔을 걷어 부치고 치웠다고 한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의논하고 살펴주는 마음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모아 함께 ‘우리’ 공간을 지켜내는 사람들! 그 추운 날, 빙판길에는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가 있었다. 한파 경보 속에서 물 범벅 얼음 범벅이 되어 손이고 발이고 온몸이 오그라들던 그날, 가슴은 더없이 따뜻했다.

눈오리 일화도 떠올랐다. 요즘 눈사람대신 눈오리가 유행이란다. 특정한 모양의 집게에 눈을 넣고 오므리면 작은 오리 모양의 눈덩이가 뭉쳐지는 것이다.

한 카페 주인이 아침에 문을 열고 나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카페 담장을 따라 귀여운 눈 오리들이 깜찍한 모양새로 줄지어 서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손님을 받을 수 없는 요즘의 암울함을 잊은 채 즐거웠다고 한다. 어느 남매가 이른 아침부터 눈오리를 만들어 온 동네를 이어 놓은 것이다. 눈오리를 두어 마리씩 집으로 데려가는 사람도 있었다. 녹으려 하면 냉동실에 넣었다 다시 꺼냈다 하며 오래도록 기쁨을 느끼고 싶다고 했다.

차가움에서도 따뜻함을 불러내고, 슬픔 중에도 사랑을 불러오는 것, 그것은 오직 사람 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서로를 위안하려는 ’우리‘라는 마음이 이 추위를 따뜻한 햇살로 만드는 힘이다. 헤쳐 나아갈 길이 만만치 않은 현실이지만 우리가 사람인 이상 희망이 있다. 그 힘이 어려운 시기에도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밀어줄 테니까.

광양경제신문 webmaster@g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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