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詩를 대하는 방법론자유기고가 김가람
  • 광양경제신문
  • 승인 2019.07.02 16:31
  • 댓글 0

시인은 아무나 사랑해서는 안 되고, 아무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쉬운 사랑의 종장에는 파멸이 잠들어 있다. 그래서 시인은 대개 만년필이나 쌀, 과자, 이불과 슬리퍼 같은 안전한 것들에 정을 쏟게 된다. 그들을 잃어버리면 울고 싶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다 놓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다. 사랑의 시는 후회의 역사이고, 시인은 적게는 일주일을, 많게는 평생을 수많은 자신들을 살해한다. 그것은 좋지 않지만 재미는 있어서 시인을 망가뜨리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시를 쓰고 싶다면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한다. 신을 모독하거나, 나를 토막 내어 가판대에 올려놓는 행위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어야 한다. 부정 후에 달려오는 긍정을 또다시 부정하고, 그러한 결론을 부정하고, 이윽고 그러한 결론을 내린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정반합이되 정반합이 아닐 때도 많다. 언어를 매개로 설명하는 것은 이토록 어렵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시인의 의무이며, 동시에 시인은 자신을 단죄하므로 죄인이 아닌 시인이 된다.

시인은 생명을 가졌지만 불온한 영혼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들은 문장의 불멸을 믿고 내일 죽을 사람처럼 염두하고 시를 쓴다. 그렇게 하나의 시가 탄생한다. 시를 쓰는 행위에는 세계를 창조하고 무너뜨리는 과정이 포함된다. 완성한 세계의 꼭대기에서, 대지의 균열에서 시인은 잠든다. 그리고 그 세계를 떠남으로서 세계에 숨을 불어 넣는다. 시가 완성되는 순간 그것은 시인의 손을 떠나게 되며, 그 세계에 발을 딛는 방문객들로 인해 시인은 누군가의 신이 된다. 동일한 맥락에서 자살자들의 유서는 훌륭한 시다. 시인은 죽음을 관습처럼 예정한다. 이런 프로세스가 없이 태어난 문장들은 시가 아니다. 읽고 상상할 수 없다면 그것은 시가 아닌 정념의 헤집기다.

시를 읽을 때의 독법 중의 하나로, 금언이 있다. 그것은 시를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좋은 시는 함께 나누는 것이 옳다. 그러나 정말 좋은 시라면 자신의 영혼에 담아두고 고요히 간직하는 것도 괜찮다. 왁자지껄한 시장의 상해가는 생선들처럼 쉽게 소비되는 문장들은 시로 간주할 수 없다.

당신이 시를 알고자 하는 인간이라면, 섭취하면 배탈만 나는 문장들을 시라고 우기는 세태를 경계하라. 각골의 과정 끝에 태어난 시를 마주할 때는 자연스레 경건해지게 된다. 시를 체험한 독자가 시인이든 아니든, 몸과 정신이 제 알아서 깨닫고야 만다. 그것이 '진짜' 시다. 시가 제 기능을 못하는 이 시대, 시인은 멸종해가는 인류종이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들의 언어를 탐미할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시를 읽는 것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삶을 즐길 줄 모르는 불쌍한 인간이다. 더불어, 가족애나 이성애 중심주의 서사, 문제적이지 않은 메타포만 그려내는 문장을 '시 같다'며 칭송하는 분위기가 문학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는 생각이다.
 

광양경제신문  webmaster@genews.co.kr

<저작권자 © 광양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양경제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