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를 마무리하는 금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곤히 자고 있는 초등학교 1학년 조카를 깨웠다. 녀석은 잠이 덜 깬 상태에서 가방을 챙기느라 부산스러웠다,나는 주방에서 밥을 차리고 녀석의 표정도 살피느라 정신없었다. 그런데 필통을 가지고 나오는 조카 녀석의 입이 댓자나 나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말투도 심상치 않았다.

“고모, 오늘 집에 늦게 올 거야.” 나는 다짜고짜 통보하는 녀석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민수네 가서 민수 엄마에게 분홍 색연필을 사달라고 할 거야” 하고 대답했다. 녀석은 뭐가 단단히 심통이 났는지 말을 하면서도 계속 씩씩댔다. 분홍 색연필에 얽힌 사연이 있는 듯해 나는 “분홍 색연필은 왜?” 하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녀석은 그제야 속마음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어제 만들기 시간에 민수한테 빌려줬더니, 이렇게 망가뜨려 놨어. 그리고 미안하다고 사과도 안 하잖아. 내가 뭐라 했더니 민수가 도리어 화를 내는 거야.” “그래서 싸웠니?”“조금. 그런데 민수가 자기 잘못을 인정 안 하고 엄마에게 가서 받으라는 거야.”

아무리 철없는 아이들이지만, 엄마에게 가서 받으라는 아이나 그 말을 듣고 받으러 가겠다는 조카 녀석이나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아이들의 천진함에 피식 웃음까지 났다. 조카의 아침을 챙긴 뒤 잘 타일러 학교에 보내고 나는 조용히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그러자 까맣게 잊고?있었던 옛 추억이 떠올랐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섬에서는 가을운동회 때나 풍선을 만져볼 수 있었다. 그만큼 귀한 물건이었다. 서울에서 큰오빠가 막내 동생 준다고 풍선 몇 개를 사가지고 왔다. 

지금은 기술이 좋아져서 풍선을 크게 불어도 터지지 않지만, 그때는 갓난아기 다루듯 조심조심 불어야 했다. 살살 다뤄도 잘 터져버리는 풍선이 야속한 시절이었다. “혹여 풍선이 터지진 않을까.” 가슴을 졸이며 풍선을 부는 큰오빠의 입만 바라보았다. 큰오빠가 풍선을 불면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큰오빠의 양 볼이 개구리처럼 조금씩 부푸는 것이 신기했다. 얼굴이 새빨갛다 못해 푸르게 변할 때쯤 풍선은 크게 부풀어 있었다. 큰오빠는 동그랗게 부푼 분홍 풍선을 실에 묶어 주었다. 나는 손뼉을 치며 팔짝팔짝 뛰었다. 

분홍 풍선을 들고 아이들이 많이 노는 학교 운동장에 가서 보란 듯이 한 바퀴 돌곤 했다. 어느새 아이들은 긴 줄을 이뤄 내 뒤를 따라 다니면서 분홍 풍선을 한 번 만져보려고 껑충 뛰고, 손은 바람에 나부끼는 풍선을 향해 하늘로 올라가 있었다. 그러다 어느 아이가 손에 힘을 쥐어 풍선을 만졌는지 풍선은 찢겨진 조각만 남긴 채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시끌시끌했던 운동장이 일시에 조용해지더니 정적을 깨는 나의 울음소리가 섬 학교의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도시 아이들 같으면 우는 아이를 내버려두고 도망을 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섬 아이들이라 순박해서 그런지 아님 우리 할아버지의 호랑이 같은 얼굴이 생각나서 그런지 서로 ‘네가 그랬잖아’ 하듯이 눈치를 보면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울고 있던 나를 빙 둘러싸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나는 볼멘 목소리로 “물어내!” 하면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발버둥을 치며 더 크게 울었다.

쓸 수 없게 된 분홍 색연필을 가지고 친구 엄마에게 가겠다는 조카 녀석이 어쩜 그렇게 어릴 적 내 모습을 그대로 닮았는지, 터져버린 풍선을 가지고 “물어내!” 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돈다. 그리고 보니 작은 것에도 행복해하던 시절이 있었다. 별 것 아닌 일에도 폴짝폴짝 뛰던 철없던 때가 있었다. 모두 소중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조카 녀석도 지금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오후에 조카 녀석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오랜만에 문구점에 가 색연필도 사고 풍선도 몇 개 사야겠다. 이왕이면 봄을 닮은 분홍색으로 골라서, 그리고 어린 시절 큰오빠가 나를 위해 불어주었던 것처럼 녀석과 함께 풍선을 불어 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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