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휴일 아침 조계산을 등산하기 위해 주섬주섬 배낭을 챙기고 있는데, 모처럼 조계산힐링센터에서 암환우들을 돌보는 원장이 함께 동행 하고 싶다며 연락이 왔다. 혼자보다는 둘이 가는 것도 좋겠다 싶어 선암사 입구에서 만나 633번째 산행 길에 올랐다. 

바람한 점, 미동도 없는 포근한 날씨 속에 주절주절 그간의 회포를 풀어가며 이어지는 이야기가 숲길처럼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는 담도암이라는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지만 본인만의 식이요법을 통해 완치돼 26년 째 탈 없이 보내며 전국 암환우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어주고 있다. 

이렇게 힐링센터 원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즐겁게 산행을 하는데, 고로쇠를 채취하기 위해  나무에 구멍을 뚫어 연결해놓은 호수를 보자 갑자기 마음이 우울해졌다. 고로쇠물을 마시면 뼈에 이롭다는 근거가 동의보감에 기록 돼 있다곤 하지만,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고로쇠물을 장기간 마셔야 그런 효과를 볼까 생각하니, 기분이 그닥 달갑지만은 않았다.

예전엔 나 역시 등산을 마치고 나면 연례행사처럼 고로쇠물을 마시곤 했는데, 지금은 등산보다 좋은 보약은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아니 등산하면서 마시는 자연의 산소는 세상 그 어떤 보약보다 효능이 뛰어나며 부작용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등산보다 보양식을 먼저 찾는 것을 볼 때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물론 나도 고로쇠 물을 좋아한다. 다만, 등산에 비길 봐는 못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예전에는 영양제가 부족해 이런 물을 통해서라도 영양분을 공급받고 싶어 했겠지만 지금은 널린 게 영양제다. 그러기 때문에 일부러 나무에 구멍을 뚫어 가면서까지 마실 필요가 뭐 있겠는가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보리밥집에 도착을 했다. 마침 배도 적당히 고팠는지라, 빨리 막걸리 한잔을 먹고 싶어 애가 닳았다. 이런 내 속사정을 알고 있었다는 듯, 원장은 특별히 빚었다는 고택주 술을 내 놓았다. 

자고로 예부터 술은 주내백약지장(酒乃百藥之長) 즉, ‘술은 100가지 약 중 으뜸’이라고 했는데, 등산 후 마시는 술이 바로 그러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고택주가 마치 향기로운 포도주처럼 목으로 술술 넘어 갔다. 이런 분위기를 눈치 챈 보리밥집 주인은 또 잘 숙성된 붉은 오디 와인(귀한 분에게만 준다는)을 내 놓았다.

우리는 이렇게 어울렁더울렁 서로의 술잔을 부딪치며 모처럼 사주팔자에도 없던 호사를 누렸다. 조계산이 수시로 내게 이런 행복을 안겨다주는 데 어찌 조계산을 찾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주말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아마 이런 행복은  금전적 가치로 절대 환산할 수 없을 것이다. 이날 술잔에 따뜻한 정을 담아서 건네준 지인들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확신하건데 이날 마신 술은 보통 술이 아니라, 마음으로 발효시킨 천상의 술이었을 것이다. 오늘로 내가 조계산에 발을 들여놓은 지 633번째이지만, 아마 내 관절이 다 마모돼 더 이상 산에 오를 수 없을 때까지 조계산 등산은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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