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쩍 추위를 많이 타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그러니까 2년 전까지만 해도 한겨울에 반팔 입고 운동해도 멀쩡했는데, 이제는 옷을 두 개 세 개 껴입어도 춥다. 왜 변했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궁금하다. 무엇이 나를 변하게 했을까?

지난 한 해 동안 나누었던 대화들에서 자주 등장했던 단어가 있다. 변화가 그것이다. 몇 년만에 우연히 뵌 분들의, ‘영은이는 중학교 때랑 똑같네.’라고 반갑게 맞이해주시는 말도 제법 들었다. 내가 ‘나’인건 변함이 없다. 그러나 나는 자라면서 또한 많이 변화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이런 질문을 제법 했던 것 같다. ‘너는 변화를 긍정하니?’

사는 장소, 생활환경, 먹는 음식, 만나는 사람, 공부하는 분야와 이해의 깊이. 어느 하나 똑 같은 것이 없었다. 한때는 마을버스 30분 타는 것도 멀미가 나서 힘 들었는데, 이제는 왕복 열 시간 걸리는 고속버스 타는 것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낯선 것들에의 잦은 만남이 그저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어리고 미숙하다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나에게 노련함은 한동안은 꿈꾸기도 벅찬 단어였다. 유달리 버거운 날에는 ‘다 때려치고’ 집에 돌아가서 이불 속에 파묻히고 싶었던 마음이 굴뚝같았다. 일 년이 지난 지금, 내가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는 문장 하나가 있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서고 싶어 했고, 똑바로 마주하려 노력했다. 변화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나의 꽤나 오랜 취미 생활 중 하나는 그림 그리기이다. 그림 그리고 있다고 엄마에게 말을 하면 엄마는 종종 내게 괜찮은지 물어보신다. 어렸을 적의 나는 마음이 복잡하거나 일이 잘 안 풀릴 때 그림을 끄적였던 걸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의 회피 수단이기도 했음을 부정할 순 없다. 그러나 내게 그림은 그 의미만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결코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반드시 밑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색을 입혔다. 밑그림을 그릴 때까지는 마음에 들었는데 막상 색을 입히는 솜씨가 서툴러 중간에 실망하고 그만둔 그림이 꽤 많다. 다시 말하면 완성했다고 볼 만한, 보여줄 만한 작품이 많지 않았다. 오래 갖고 있는 그림 노트도 거의 없다. 들여다보기 싫었던 것 같다. 나의 서투름을. 나조차도 따뜻하게 보듬어줄 수 없었던, ‘나의 단점’은 꽤나 외로웠을 것이다. 그도 이해받고 싶었을 텐데. 무언가로부터 도망쳐 나와 향한 곳은 나의 안식처가 될 수는 없었다. 또다시 도망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된 후, 일과를 끝내고 남은 여분의 시간이 아무래도 중고등학교 시절보단 많아졌다. 내가 직접 나의 하루의 계획을 짜고 시간 분배도 하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해야 할 일들에 집중하는 데 몰두하는 날, 여유를 갖고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날도 만들 수 있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내게 최고의 휴식은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시간. 그로부터 기쁨과 충만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간. 물론 부족한 잠을 걱정 없이 채우는 것도 내게 귀중한 회복 중 하나다. 그러나 잠에 지나치게 파묻힌 날에는 하루가 멍했고, 노곤함 이외의 감정을 맞이하기 어려웠다. 감각이 둔해지는 것을 가끔 바라는 순간도 있긴 했지만, 막상 그러하게 되었을 때 내게 찾아온 손님은 공허함이었다.

아무 것도 나의 마음을 짓누르지 않은 날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책상에 앉아서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드로잉 북과 펜을 꺼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왜 그랬는지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핸드폰을 뒤적이다 사진첩에 있는 장미 사진을 보고 바로 흰 종이에 검은 펜으로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간에 빠져들었다. 신기하게도, 지루하거나 재미를 느끼지 못하겠는 수업에서의 5분은 25분 같은데, 집중할 수 있는 것을 할 때의 시간은 1시간이 10분 같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러하다. 그날 앉아서 세 시간을 그림만 그렸던 것 같다. 학기 중에 그렸던 그 그림은 광양에 내려올 때 가져와서 지금 내 책상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다. 처음으로 밑그림 없이 나의 순간들을 찰나에 담았다. 굵기도 균일하지 않고, 삐져나온 선들과 강약 조절이 잘 되지 않은 그저 서툰 그림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그리면서 즐거웠고, 몰두할 수 있었고, 완성된 그림을 보며 충만함을 느꼈다. 나는 행복했다.

그 이후로 나는 그림을 그릴 때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물론 정교함은 좀 떨어진다. 덜렁대기 십상이라 실수도 잦고 한번 어긋난 선은 다시 돌이키기 어렵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은’ 세계에 뛰어드는 게 즐겁다. 미숙함이 나를 실망시키던 족쇄로부터 나만의 열쇠를 찾은 듯하다. 서투른 게 좋다는 말은 아니다. 여전히 나의 선망의 대상 중 하나는 노련함이다. 그러나 나는 무엇 하나 완벽한 사람은 아니다. 농구 자유투를 좋아하지만, 열 번 던져서 네다섯 번 들어가면 아주 잘 한 거고, 책 읽는 걸 좋아하지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요리를 좋아하지만, 과일 껍질도 제대로 깎지 못하고, 사람과 대화하고 글을 쓰는 걸 좋아하지만, 어휘력도 부족하고 문장도 서투르기 그지없다. 

나답게 산다는 것. 즉 인간답게 산다는 것. 그것의 출발점은 ‘사랑’한다는 게 아닐까? 내가 말하는 사랑의 정의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 감정이 아니다. 외면하려 들지 말 것. 바라봐주고 싶어 할 것. 쥐어짜대고 혼내지 말 것. 이만하면 됐지, 안아줄 것. 스스로를 깎아내리려 들지 않을 것. 나만의, 타인의 생각의 틀에 스스로를 가둬 두지 않을 것.

스스로를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기존의 틀을 부수고 나온 세상의 공기가 어떠하냐고 묻는다면, 추워 얼어버릴 것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옷을 입어도 틈새를 파고드는 한기는 왜 더 진해지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찬 공기가 폐부에 스며들어와 나의 정신을 뒤흔들 때 눈을 떠 피로감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추위를 어떻게 견뎌낼 지 고민한다. 방법을 찾고 뭐라도 하고 싶어 한다. 춥다고 투덜대지 않는다. 독한 추위는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한탄만으로 나를 힘들게 하는 걸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기운 빠지게’ 만들고 싶지 않게 되었다. 무엇이 나를 견디게 했을까? 무엇이 나를 변하게 했을까? 이유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변화를 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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