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언제갔는지 모르겠어. 건강할 때 서로 愛끼며 살아야해"

주방에서 식사를 마치신 조정래 어르신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런데 정말 101세의 나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눈매는 여전히 살아있었고 몸짓은 정갈한 선비 모습 그대로였다. 할아버지는 조심스럽게 침대에 걸쳐 앉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니,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와 주어 고마워요” 흔히 노인 한 사람이 세상을 뜨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좀 과장이기는 하지만, 그 만큼 노인의 인생이 소중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올해 101세인 조정래 할아버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 1세기 즉 100년의 세월을 살아오신 그분의 기억 속에는 우리나라 근대사가 오롯이 편집되어 있는 셈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이면 고종임금 시절, 흥선대원군이 섭정할 때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건강하게 장수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큰사위인 송현종 씨와 그의 부인 조영자씨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덕분이었다.

일본에서 사진을 공부하다

할아버지는 광양에서 태어나 광양서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일찍이 한학자인 아버지 덕분에 한문을 접하며 글공부를 깨우쳤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은 일제 식민지 시절이라 도저히 삶의 희망을 찾을 수 없자, 기술을 배우러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할아버지는 뚜렷한 기술이 없어 일단 공장에 취직한다. 하지만 친한 친구가 “그렇게 살아서는 평생 제대로 된 기술하나 배우기 힘들 테니까, 사진을 한번 배워 보는 게 어떻겠느냐” 라는 말에 사진 학교에 입학을 한다.

그런데 막상 사진학교에 입학 했지만 학비가 만만치 않아 낮에는 공사판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사진공부를 하며 어렵게 학업을 마치게 된다. 그리고 그 당시 쓰미오시 市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관에서 실습 과정을 밟는다. “당시 내가 좀 성실했던지 이 사진관 사장이 나를 엄청 신뢰했지. 그런데 대동아전쟁이 벌어지자 소집 명령이 떨어졌고, 이 사진관 주인도 군대에 입대를 하게 되지. 그러자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이 사진관을 잘 좀 지켜 달라 거야” 당시 조선 청년에게 자기 사업을 맡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정도로 할아버지는 높이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다시 한국으로

할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사진관을 꾸려 나갔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 배운 기술을 고향에 돌아가 전파하고 싶다는 열망에 그 좋은 환경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고향에 오자마자 오야마사진관을 운영했지. 그런데 전쟁이 벌어지면서 물자가 귀해 도저히 사진관을 운영해 나갈 수 없어 접고 말았지” 할아버지는 그 때가 못내 아쉬운지 몇 번이고 허공을 응시했다.

그래서 다시 일본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여권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당시 손위 형님이 일본 고등계 형사에게 절대로 여권을 발급해주지 못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끝내 일본을 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물론 형님 부탁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사실은 내가 일본어를 엄청 잘해 당시 일본 경찰서장이 나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기 위해서 여권을 만들어 주지 않았던 거야” 할아버지는 그 때 일본으로 건너가지 못한 게 몹시 후회 된다고 했다. 아마 두 번째 일본 땅을 밟았다면 지금 크게 성공했을 것이라며 웃음을 보였다.

뛰어난 붓글씨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이야기 상대를 만나 정말 기분이 좋다며 쉼 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기억력은 젊은 사람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확했다. “나이가 드니까 친구들도 모두 떠나고 없어. 불과10년 전에는 가까운 영감들이 우리 집에 모여 하루종일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지금은 웬종일 나 혼자 지내지” 할아버지는 세월이 총알처럼 빨리 간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90이 넘어서도 붓글씨를 손에 놓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셨다고 한다. “그동안 참 많은 비문을 써주었지. 한 번은 잘 아는 사람이 내게 글을 좀 써달라고 해 써 주었더니, 100만원을 줬어. 아마 서울에 가서 제법 많은 돈을 받고 팔았나봐” 할아버지는 광양향교 비문을 물론 각종 마을 비문을 도맡아 써주다시피 할 정도로 필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정직함이 목숨살려

“형님이 봉강부면장을 할 때였지. 면장은 달아나고 형님만 면을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인민군이 들이닥쳐 인민공화국 만세 3창을 하라는 거야. 어쩌겠어. 멋도 모르고 형님은 그렇게 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돼 형님은 빨갱이로 몰려 죽고 말았지. 그리고 마을 전신주 두 개가 잘리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내가 형님의 억울한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그랬다고 투서를 넣은 거야. 결국 고문에 못 이겨 내 동생과 내가 그렇게 했다고 거짓 진술을 했지.” 그러나 이 사건을 조사하던 당시 봉강지서 김철관 주임이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다시 꼼꼼하게 조사를 하던 중, 동생 집과 할아버지 집에 있던 톱이 녹슬어 있다는 것을 알고 무죄로 풀러나게 되었다고 한다. 타인을 모함 하지 않고 살아온 할아버지 정직성이 목숨을 구한 셈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데 할아버지 큰 딸인 조영자 씨는 아버님은 요즘도 옥편을 펼치고 하루 종일 읽는다”며“ 갈수록 더 건강해지는 것 같다”고 귀뜸했다.

홍봉기 기자 lovein298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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